[입장문]
끝내 ‘사죄’ 한마디 없었던 한일정상회담
후쿠시마 핵 오염수 해양투기 들러리에,
한일안보협력을 빙자한 일본 재무장만 키웠다
‘셔틀외교’ 복원이라는 말만 무성한 채 기대했던 일본의 ‘화답’은 이번에도 없었다. 7일 서울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일본 총리 간 한일정상회담은 일본의 ‘호응’은 고사하고, 한마디의 사과 표명도 없는 ‘빈 손’ 회담이었다.
일본 피고 기업의 배상 책임을 한국이 대신하는 소위 강제동원 ‘제3자 변제’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빗발치자,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월 2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한국이 선제적으로 걸림돌을 제거해 나간다면 분명 일본도 호응해 올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일방적 퍼주기도 모자라, 그러한 철없는 기대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이었는지 이번에 다시 한 번 윤 정권의 깡통외교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번 회담의 관건은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얼마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반성을 보여줄 것인지에 대한 여부였다. 그러나 기시다 총리는 “1998년 10월 일-한 공동선언을 포함해 역사 인식과 관련된 역대 내각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며 기존 일본 정부의 입장을 한 번 더 반복하는데 그쳤다.
기시다 총리가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언급하고 있지만, 역대 내각의 입장 중에는 “전후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과를 계속할 숙명을 지게 해서는 안 된다”며 한반도 불법강점과 식민지배 책임, 일본군성노예제를 부정한 2015년 ‘아베 담화’와 강제동원을 부정한 2021년 스가 정부의 각의결정도 포함돼 있는 점을 볼 때, “역대 내각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계승하겠다는 것인지조차 사실 종잡기 어렵다.
일본이 진정으로 ‘통절한 반성과 사죄’의 태도가 있다면, 한국 대법원 판결대로 피고 일본기업이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해 사죄하고 배상하면 될 일이다. 유엔 등 국제사회가 수없이 권고해 온 일본군성노예제에 대한 책임 인정과 공식 사죄, 법적으로 배상을 실천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일본은 피해자들의 아픔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이것이 ‘기존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것의 실체다. 기시다 총리는 이러한 입장을 다시 한 번 서울에서 천명한 것이다.
기시다 총리가 이날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이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하게 된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말한 것도 교활한 물 타기 발언이다. 기자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말로 명확히 이해해도 되느냐?”고 묻자, 기시다 총리는 일본 총리 자격이 아니라 ‘사견(私見)’이라며 선을 명확히 그었다. 한일 두 정상이 갖는 공동 기자회견에서 발언이 총리 자격이 아니라 사견이라고 하는 것도 참으로 옹색한 일이지만, 이런 진정성 없는 태도에서 어떤 사죄와 반성의 기미를 찾아 볼 수 있을 것인가?
또 기시다 총리가 언급한 ‘당시 혹독한 환경 속에서 일하게 된 많은 분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인가?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가 언급될 때마다 “당시 전쟁이라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일본인들도 많은 고생을 했다”며 책임회피성 발언을 일삼아왔는데, 기시다 총리가 언급한 것은 당시 일본인들을 지칭하는 것인가? 아니면 일본에 의해 강제 동원된 조선인들을 얘기하는 것인가? 도대체 주어가 누구인지, 누구를 상대로 언급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장난 같은 유감 표명을 과연 진정한 사과라고 볼 수 있는 것인가?
‘일하게 된’ 사람들이 ‘불법행위’로 인한 ‘강제동원’ 피해자인지, 단순한 ‘생계형’ 노동자인지, 강제동원의 ‘주체’가 일본정부인지 누구인지조차 밝히지 않은 모호한 표현으로 어물쩍 넘어가려는 태도는 참으로 치졸하기 짝이 없다. 엄밀히 말해 기시다 총리는 서울에 와서 윤석열 대통령을 면전에 두고 다시 한 번 ‘강제동원은 없었다’는 점을 훈계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울러 사태의 원인과 가해의 주체를 가린 채 ‘힘들고 슬픈’, ‘경험’을 한분들을 향해 “개인적으로 가슴 아프다”며, 남의 일처럼 영혼 없는 동정을 보낸 것에 불과하다.
기시다 총리 눈에는 사지에 내 몰려 배고픔과 고통 속에 혹독한 인권 유린을 당한 강제동원 피해자들, 소나 말처럼 취급받다 끝내 불구가 되거나 고향 땅조차 밟지 못한 피해자들의 쓰라린 고통이 한낱 ‘경험’처럼 보이는가? 피해자들을 모욕하는 이런 무책임한 발언에도 멍하니 듣고만 있는 윤석열은 도대체 어느 나라 대통령인가?
더 심각한 것은 윤석열 대통령의 천박한 역사인식이다. 윤 대통령은 이날도 “과거사에 대한 인식 문제는 진정성을 가지고 하는 것이 중요하지 어느 일방이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며 “과거사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현안과 미래 협력을 위해 한발 짝도 발걸음을 내디뎌서는 안 된다는 그런 인식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일본은 사죄는커녕 반성조차 없는데, 일방적 퍼주기도 모자라, 일본에 대해서는 아예 묻지도 따질 생각도 하지 말자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달 워싱턴포스트와 가진 인터뷰에서는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하더니, 도대체 어디까지 막 갈 셈인가?
피해국이 가해국에 대해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뭐가 잘못인가? ‘어느 일방이 상대에게 요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 반대로 전범국 일본이 한국에 회초리를 들고 올바른 역사인식을 물어야 한다는 것인가? 도대체 당신이 수호해야 할 주권은 어느 나라 주권이며, 당신이 지켜야할 국익은 어느 나라 국익인가?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일본의 식민지배의 과거사를 지우면 그 끝은 일본의 재무장화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일 정상회담 뒤 한 공동 기자회견에서 한-미 핵협의그룹(NCG) 구성을 담은 ‘워싱턴 선언’에 “일본의 참여를 배제하지는 않는다”고 언급한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표명하지 않을 수 없다. 한·미·일 안보협력 강화를 통해 중국 견제에 전략적 초점을 맞춘 미국이 바라는 목표다. 미 중 대결의 신냉전 시기에 어느 한편에 몰입하다가는 결국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더욱 심화될 것이고, 이를 핑계로 일본은 군사대국화로 나아갈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덧붙여 후쿠시마 방사성 오염수 해양투기 관련하여 한국 전문가 현장 시찰단 파견에 합의했다고 한다. 지금 국민들이 불안해하는 핵심 이유는 일본의 자국의 핵 오염수 기본 데이터를 투명하게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조사도 아닌 시찰에만 그친다. 이는 결국 일본 정부의 핵오염수 처리에 대한 명분 쌓기에 불과한 것이다. 시찰단이 아닌 시민사회, 전문가가 참여하는 한일공동조사단을 구성해 한일공동조사를 진행해야 한다.
2023년 5월 8일
한일역사정의평화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