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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인의 삶, 수행, 내적 평화

티베트불교에서 배우는 평화로운 삶

주민황 │‘나의 아들 달라이라마’역자, 동국대 인도철학과 강사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모인 이 모임에서 어떤 말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평화를 얻었다, 평화가 깨졌다는 식으로 우리는 말합니다. 평화스럽지 못했던 상태가 사라지고 편안해진 상태를 평화를 얻었다고 말하고, 평화로웠던 상태가 사라지고 불편해진 것을 평화가 깨졌다고 표현합니다. 둘 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인 상태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평화에 대해서 쓰는 표현은 그렇게 수동적입니다. 그러나, ‘평화를 만든다’는 능동적인 표현은 평화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는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런 의지는 평화를 인위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빠질 위험도 있는 듯합니다. 평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에 투쟁의식이 결합되면, 전투하는 마음으로 평화를 얻기 위해 싸우는 형상이 됩니다. 그래서 평화운동을 하다가 마음이 지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투쟁을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평화를 깨뜨리는 것 같은 느낌까지도 받을 수 있습니다. 평화를 만들겠다는 운동이 평화를 깨뜨리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반전운동이나 평화를 위한 시위를 하는 광경이 뉴스에 보도되곤 합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그 모습은 비슷합니다.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단호한 의지와 성난 표정을 한 군중들이 손에는 평화의 구호를 적은 종이를 들거나 큰 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합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전투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저는 얼마 전에 뉴스를 보면서 평화시위를 저렇게 하면 효과적이고 감동적이겠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에 미사일 폭격까지 하면서 지나친 공격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 매일 전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스라엘 국민들 60퍼센트 이상이 그 공격에 찬성하고 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이 모두 민족이기주의자들이고 전투적이라는 생각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이스라엘의 평화주의자들이 예루살렘의 어느 광장에 모여서 손에는 촛불을 하나씩 켜들고 평화를 기원하며 조용히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뉴스화면에 보였습니다. 그들의 분위기는 아주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화면에 비친 사람들의 얼굴은 평화로웠고,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를 얻기를 기도하는 노래를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이스라엘에도 저런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하는 감동과 안도감이 생겼습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스라엘인들도 팔레스타인들도 평화롭게 살게 되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사회에 대한 희망이 생겼습니다.
평화로운 모습으로 평화운동을 해야 다른 사람들을 평화롭게 만들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평화운동이 사회와 개인의 평화를 얻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투쟁적인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서 평화시위나 반전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외면하는 사람이 저 뿐만은 아닐 겁니다.
제가 오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입니다.

우선 여러분들의 얼굴을 보겠습니다. 지금 마음이 평화롭습니까. 제 얼굴은 어떻습니까? 요즘 저를 보는 사람들은 얼굴이 아주 편안해 보인다고 합니다. 사실 참 많이 평화로워졌습니다. 사회정의를 생각하며 분노하던 젊은 시절에는 옳은 생각을 하지만 마음의 평화는 부족했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무리 올바르고 양심적으로 살려고 애써도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사회를 부패하게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좌절하고 분노합니다.
그래서 인간 사회에 대한 희망을 잃고 남들을 사랑하는 마음도 사라집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평화운동을 하면서도 좌절하고, 정서적으로도 삭막해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삭막함과 좌절감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되면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도 점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있는 한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길 원하고 행복하기 위해서는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말씀드리는 것은 제가 마음의 평화를 완전히 얻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평화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 여러분만큼이나 크기 때문입니다. 저는 요즘 마음의 평화를 화두로 삼고 삽니다.
제가 며칠 전에 겪은 작은 경험을 통해서 저는 윤리적 약속을 지키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 중의 하나라는 것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저는 어느 할인마트에서 물건을 사고나서 계산을 했습니다. 똑같은 종류의 물건을 두개 샀었는데, 계산하는 사람이 그것을 하나로 잘못 계산했습니다. 저는 계산원에게 영수증을 보여주고 돈을 더 냈습니다. 계산원은 미안하다고 말을 하면서 저를 이상한 사람처럼 쳐다봤습니다. 자신의 실수를 지적한 것이 불쾌한 듯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바보처럼 보이면서까지 돈을 더 내는 것은 제 자신의 소중한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물건값을 안 내고 가면 제가 도둑질한 셈이 되자나요” 라고 말하면서 저는 돈을 더 냈습니다.

인도에서 살 때도 가끔은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인도상인들은 가끔씩 계산을 부정확하게 합니다. 저는 그들의 계산 능력을 불신하기 때문에 제가 계산을 다시 해보고 돈을 냅니다. 상인이 돈을 적게 계산한 경우에도 제가 정정해주고 돈을 더 냈습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웬 바보냐 라는 시선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다음부터 그 가게에 갔을 때는 주인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신뢰할 만한 사람을 만나서 고맙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훨씬 더 친절해졌습니다. 그리고 다른 손님들에게도 정직하게 대하려는 태도가 역력해졌습니다. 다른 상점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아주 작은 금액의 거래이지만, 개인의 작은 노력이 여러 상인들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서로 신뢰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의 그런 행동을 보고 주위사람들은 결벽증이라거나, 그래가지고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 가냐고 걱정하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그 결벽증 때문에 이 세상을 마음 편하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며칠 전의 경험을 통해서도 제가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내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는 노력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자신에게 정직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제 마음을 평화롭게 하고, 제가 당당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을 재확인했습니다.
가격은 단순히 숫자가 아니고, 일종의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이 윤리이고, 윤리적 가치를 지키지 않고는 마음의 평화는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 작은 예를 든 것입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약속 없이는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약속이 깨어졌을 때 사회에는 갈등이 생기고 혼란이 옵니다. 그런 사회는 평화로울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평화이든 사회적인 평화이든 간에 윤리적 가치가 확고히 밑받침되어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이고 작은 범위의 약속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입니다.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남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인 사회가 어떻게 믿을 수 사회가 될 수 있습니까? 사회는 개인들의 모임입니다. 개인들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 사회도 올바르지 못합니다. 개인들이 평화롭지 못하면 사회도 평화롭지 못합니다.
사회가 올바르게 되면 나도 올바르게 행동하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올바르게 살게 된 후에 나도 올바르게 살겠다는 계산입니다. 평화로운 개인들이 많아질 때 윤리적으로 올바른 평화로운 사회가 이루어집니다. 약은 계산인 것 같지만, 그런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사회는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개인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회의 평화도 사실은 개인의 평화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개인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저는 오늘 티베트불교를 믿는 티베트인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아마 참고가 되실 겁니다. 여기 오신 분들은 불교신자도 있겠고, 천주교도나 기독교인들도 있겠고, 그 외의 다른 종교를 믿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요. 종교는 사람들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입니다. 여러 가지 종교는 각자의 기질에 맞게 만들어진 방법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종교가 중요하듯이 남들의 종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다른 종교의 가르침이라도 가치 있는 삶에 도움을 주는 지혜라면 배우려는 성숙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러 가지 종교가 활성화되어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공통점은 사람들에게 관용과 사랑과 자비와 용서와 평화라는 가치를 길러주는 것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치들은 종교를 갖고 있지 않는 사람들도 요구하는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종교만이 옳다는 신념 아래 다른 종교들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세력을 넓히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의 몰지각한 광신도들이 다른 종교의 상징물들을 파손시키거나 멸시하는 말들을 하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싸움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으로, 이슬람과 힌두교의 갈등은 파키스탄과 인도의 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종교를 이용해 권력을 누리려는 자들은 사람이 종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세뇌시킵니다. 우리 사회에서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종교를 이용해 권력을 누리거나 재산을 모으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개인들이 지혜를 갖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도 종교를 이용해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매한 개인들이 많은 사회는 우매하고 불안한 사회가 되고, 지혜로운 개인들이 많은 사회는 지혜롭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의 평화가 사회의 평화를 만드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오늘 티베트인들의 불교정신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에 대해서 종교적인 편견을 갖지 말고 편안히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티베트인들은 중국의 무력침공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채 살고 있습니다. 달라이라마는 1959년에 인도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세우고 지금까지 티베트불교를 세계에 전파하고, 티베트의 상황을 알리며 여론을 환기시켜왔습니다. 달라이라마가 인도로 망명한 직후 10만명의 티베트인들이 인도로 따라 나왔습니다. 그 후로도 중국치하의 티베트 본토를 떠나 인도로 망명하는 티베트인들의 수는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티베트를 떠날 때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도 다 버리고 빈 몸으로 왔습니다. 부모형제를 다 잃고 홀로 온 사람들도 많습니다. 티베트인들 대부분은 인도에서 막노동으로 생계를 꾸려나갔습니다. 과거의 부귀영화를 하루아침에 빼앗기고 도로공사에서 돌 나르는 일을 하거나, 숲을 개간해서 옥수수 심는 일을 하면서 인도의 더위와 싸우면서 적응해야 했습니다.
인도정부가 망명지로 내준 산골짜기나 오지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켜가면서 모여 사는 사람들의 분위기는 어떨까 상상해 보십시오. 어둡고 분노에 찬 얼굴들이 떠오르겠지요? 사실을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항상 웃고 삽니다. 저 사람들은 나라를 되찾을 투지도 없는 바보들인가 싶을 정도로 그들은 낙천적이고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웃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태평하냐고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내가 걱정하고 우울하게 산다고 해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사실이 바뀌겠어요? 그들이 우리나라를 빼앗았지만 우리 마음까지 빼앗을 수는 없지요. 우리가 티베트 땅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계속해야지 되지만 분노에 찬 마음으로 살아서는 안 되지요.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고, 달라이라마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고, 염주를 돌리며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자유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울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괴롭힐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나라를 빼앗긴 것은 우리 국민이 과거에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과보를 받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잘못에 대한 벌을 받고 있으니 이 벌이 끝나면 나라를 되찾을 겁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빼앗은 중국인들은 그 죄에 대한 과보를 앞으로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생각해보면,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어요.”
도인들이나 할 것 같은 이런 대답을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들도 처음에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분노를 평화로운 마음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불교를 통해서 배웠습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분노와 욕심과 어리석은 마음에 휘둘리며 삽니다. 휘둘리는 정도가 심한 사람이 있고, 덜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분노와 욕심이 생겼을 때 그것을 금방 알아차리고 그 원인을 분석하면 그 감정이 사라져 버리고 마음은 평화로워집니다.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은 분노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분노가 일어나더라도 분노가 머물지 않고 금방 지나가 버리게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를 거부하려고 싸우지 말고, 그 분노가 왜 일어났는지 분석해보면 어리석다는 것을 알게 될테니 분노의 감정이 그냥 흘러가 사라지게 내버려두라고 불교에서는 가르칩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불교에서는 ‘나’에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되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행복을 주고 집착은 고통을 준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아시겠지요? 자식을 사랑할 때는 행복하지만, 집착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할 때는 고통을 만나게 된다는 것도 경험하셨겠지요?

집착하지 않고 사랑하며 행복해지려면 ‘나’에 대한 집착을 우선 버려야합니다. ‘나’, ‘내것’, ‘내 집’, ‘내 차’, ‘내 친구’, ‘내 부모’ 등등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욕심이 생기고, 집착하게 됩니다. 영이에게는 영이가 ‘나’이지만, 민수에게는 민수가 ‘나’입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나’를 갖고 있습니다. 영이의 ‘나’가 고통을 피하고 행복해지고 싶듯이, 민수의 ‘나’도 고통을 피하고 행복해지고 싶어한다는 걸 대등하게 인정해야한다고 불교에서는 가르칩니다. 그런 점에서 모든 중생이 평등하다고 말합니다. 현재의 영이의 ‘나'는 영이를 ’나‘라고 생각하지만, 영이의 전생의 ’나‘는 전생의 아무개를 ’나‘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렇듯이 우리가 ‘나’라고 생각하는 대상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실체가 아닙니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나’의 실체가 없다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습니다.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계속해서 다른 육체를 바꿔가면서 태어나는 것을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윤회하는 생명체들을 중생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이 열반에 드셨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완전한 평화상태에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이라는 것은 산스크리트로는 붓다(Buddha)라고 하는데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사물이나 사람에게 영원한 실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보는 현상은 일시적으로 여러 가지 조건들과 원인들이 모여서 생겼다 사라지는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깨달으면 부처님이고 못 깨달았으면 중생입니다. 깨달은 분은 세상에 대한 집착이 더 이상 없으니 윤회에 빠지지 않습니다. 깨달았더라도 중생을 돕기 위해서 일부러 세상에 태어나는 분들을 보살(菩薩 :보디사트바, Bodhisattva)이라고 부릅니다. 티베트인들은 달라이라마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믿습니다.
윤회하는 중생의 과제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러 열반에 이를 때까지 열심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그것을 평화로운 마음으로 바꾸는 것도 수행입니다. 중생이 윤회하는 이유는 업(業)을 계속해서 쌓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업을 만들지 않으면 윤회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욕심과 어리석음과 분노 등으로 인한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면 우리 의식에 흔적이 남아 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업’은 산스크리트어로 카르마(karma)라는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카르마는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각이나 말이나 몸으로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의 흔적이 우리의 의식 속에 남습니다. 그 흔적을 ‘업’이라고 부릅니다. 나쁜 행동을 한 사람의 의식에는 그 행동으로 인한 자책감이나 사나움이나 어리석음 등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 흔적은 그 사람의 기질이 되어서 나중에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그 기질대로 대응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업’대로 산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남은 속여도 자기 자신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하지요. 자신의 행동은 자기의 의식 속에 흔적이 남고 각인되기 때문입니다. 업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말로 하거나 생각으로 하거나 몸으로 하는 행동을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티베트인들은 업이라는 것을 확고히 믿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고, 과보를 달게 받으려는 자세를 갖고 있습니다. 티베트인들이 나라를 빼앗긴 것을 과거의 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중국인들이 침략의 업에 대한 과보를 미래에 받을 거라는 생각도 티베트인들이 업에 대한 가르침을 믿기 때문입니다. 업사상은 숙명론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려는 태도이고, 미래를 희망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입니다. 티베트인들이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낙천적인 것은 삶을 미래를 준비하는 수행의 장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티베트 불교는 대승(大乘)불교입니다. 대승불교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생겨났습니다. 나 혼자만 고통에서 벗어나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는 완전하지 않다는 생각에서 모든 중생들이 똑같이 행복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 대승불교의 근본정신입니다. 대승이라는 말은 큰 수레라는 뜻으로, 작은 차로 한 사람만 싣고 갈 것이 아니라, 기차처럼 큰 차에 많은 사람들을 함께 실어 행복한 곳으로 함께 가자는 뜻입니다. 티베트인들의 삶을 더 건강하고 강하게 만드는 요소는 모든 중생들이 같이 윤회를 헤매는 동지라는 의식입니다.

티베트 불교가 활기를 잃지 않고 살아있는 힘을 유지하는 것은 업과 윤회에 관한 가르침을 확고히 믿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생이 업에 떠밀려서 수많은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에 언젠가 한번은 나와 부모 자식의 관계로 만났을 거라고 믿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을 낳고 기르는 동안에 온갖 정성을 다해서 보살피듯이 모든 중생이 언젠가 한번쯤은 내게 그런 사랑과 보살핌을 베풀었을텐데 지금도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는 생각을 갖고 중생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모든 중생들을 어머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소중한 어머니들이 윤회에서 고통받고 있으니, 내가 먼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러 지혜를 가지고 그들을 부처님의 경지로 이끌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성불하고 싶다고 기원합니다.
티베트인들의 모든 기도문에는 그런 기원이 맨처음에 나옵니다. 그리고 기도나 명상이 끝난 후에는 자신이 쌓은 공덕으로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고 자신의 공덕을 바치는 회향기도를 반드시 합니다. 모든 중생은 나와 경쟁관계인 잠재적인 적이 아니라, 내가 도와주고 싶은 어머니들입니다. 그런 생각들이 티베트 사회의 힘입니다. 어떤 사회가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한지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가에 달려있습니다.

생각은 전염되기 마련입니다. 난폭하고 탐욕스럽고 공격적인 생각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 생각들이 사람들을 전염시켜 난폭한 사회를 만듭니다. 반면에 평화로운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평화스러운 생각을 전염시킵니다. 성인의 주위에 들짐승들과 새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그림을 보셨을 겁니다. 평화로운 사람에게는 짐승들조차 두려움 없이 가까이 가고 싶어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남들에게 평화로운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입니다. 그리하려면 스스로 평화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평화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살상무기는 사람의 육체를 해칠 뿐이지만, 평화로운 마음은 살기 띈 마음조차 무력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가졌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려면 네 자신부터 행복해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부정부패와 폭력으로 찌들어 있는데 어떻게 행복할 수 있냐고 말하지 마십시오. 부정부패와 폭력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있는 의식을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인생은 지구의 자원을 마음껏 축내고 먹고 즐기다가 죽으면 그만 이라는 무책임한 생각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중생 모두가 지구의 자원에 의존해서 살아간다는 의미에서 중생 모두가 한 식구라는 것과 식구끼리는 콩 하나도 나눠 먹어야한다는 생각을 갖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그것을 반성하고 덕을 쌓을 기회를 갖기 위해서 더 오래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그것을 부인하거나 자학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은 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비슷합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듯이 나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을 때는 즉시 그것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면 됩니다. 나 자신도 중생입니다. 모든 중생을 사랑하듯이 나 자신도 사랑하고 보살펴야합니다. 남들을 배려하고 사랑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우리가 윤회를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티베트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우리 안에는 철부지 아이 같은 미성숙한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반면에 부처님의 지혜가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불성(佛性)이라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미성숙한 생각들입니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자신과 남들 속에 있는 그런 미성숙한 생각들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미성숙하고 어리석은 생각이었다는 것을 알면 그것을 버리게 됩니다.
어리석은 생각들의 정체를 알고 버릴수록 우리의 생각은 순수해지고, 잠재된 불성이 밖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숨겨져 있는 꽃씨에게 깨끗한 물을 주고 가꾸어 아름다운 꽃을 피게 하는 것이 부처님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 마음속에 아름답고 성숙한 생각들이 자라나도록 노력하는 삶이 의미있을 거라고 동의할 수는 있을 겁니다.

제가 티베트인들의 예를 들어가면서 오늘 말씀드리고자 한 바를 요약하자면, 우선 내가 행복하고 평화로운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꽃의 향기가 주위에 퍼져나가듯이 평화로운 사람은 평화를 주위에 퍼져나가게 합니다.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는 여러분은 사랑과 자비심이 가득한 어머니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는 한 우리 사회는 행복한 사회입니다. 잘 알려진 다음의 말로써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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