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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만드는 여성회
8기 여성평화아카데미: 2002.10.17


군사주의와 여성


한 홍 구 (성공회대 교수ㆍ한국현대사)

1. 들어가는 말
- 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
- 왜 여성들이 군대와 전쟁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나?
- 최근 이대 총학생회에 대한 사이버 테러
- 군 가산점 논쟁 당시의 사이버 테러
- 월장 사태
- 우리 사회의 군사주의: 30여 년의 군사독재: 대통령만 민간인 출신이 된다고 군사독재 체제가 바뀌는 것은 아님: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의 지속
- 우리 사회에 만연한 군사주의의 여독
- 군사주의는 남성과 여성을 어떻게 파괴하는가?:
- 전쟁이라는 특수상황
- 일상생활에서 군사주의의 영향과 여성

2.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 역사적 배경
- 조선시대: 전통적으로 문(文)을 중시: 군사력 육성에 힘을 쏟지 않음
- 대한제국기: 부국강병에 대한 소망: 그러나 실현되지 못함
- 일제강점기: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징병제 실시
외국의 지배 하에 징병제가 실시된 특이한 사례
- 대한민국 건국: 징병제의 도입과 폐지
- 한국전쟁
- 국민방위군 사건
- 한국전쟁 종전과 군의 팽창: 60만 대군
- 한국현대사에서 왜 군의 역할이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는가?
- 감군 압력
- 5ㆍ16 군사반란
- 베트남 파병과 군사주의의 확산
- 1968년 1ㆍ21사태 이후의 변화: 예비군 창설, 군복무기간 연장, 주민등록증 제도 / 3선개헌 / 고등학교 및 대학에서의 군사교육 실시 / 주한미군 철수
- 병영국가 대한민국의 탄생: 만주국과의 비교

3. 징병제의 문제점
- 근대국가의 출현과 징병제도의 의의
- 징병제도의 한국적 특수성
- 현행 부분징병제의 문제점
- 형평성: 국민개병제에서 빈민개병제로 전락
- 사병 인권
- 사병 처우: 월급 문제 / 후생
- 인력 관리의 효율성
- 현행 징병제의 기능: 국방력 충원기능
훈육기관으로서의 기능
- 모병제의 가능성과 문제점

4. 병역비리
- 노블리스 오블리제?
- 전통사회에서 엘리트와 병역의무 / 서구와의 비교
- 1950년대의 병역기피
- 병역기피와 사립대학 비리
- 1960년대의 병역기피
- 1970년대 이후의 구조적 문제점: 인구자원의 증가와 복무기간 연장: 인력이 넘쳐나게 됨: 정부는 이 인력을 각종 특례나 대체복무제도를 만들어 해결
- 방위병 제도 / 전투경찰 제도
- 병역특례의 확대: 처음에는 방위산업체: 현재는 일반 제조업까지 확대
- 전문연구요원 등 각종 특례
- 박정희 시기: 특수층 자제들에 대한 특별관리
- 1980년대: 석사장교 제도: 특수층 자제들의 합법적인 병역면제 통로: 1990년 대학원 입학자들을 마지막으로 이 제도 폐지: 특수층 자제들의 군대 빼먹기 심각해짐
- 현재 병역비리 문제의 본질은?
- 병역비리의 해결책은?

5.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특정종교 신자들에 국한된 문제로 인식되어 옴
- 그러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은 민주주의의 근본인 양심의 자유에서 파생된 보편적인 문제
- 사상의 자유와 비전향 장기수
- 양심의 자유와 여호와의 증인
- 이 두 집단은 국가주의, 반공주의, 군사주의 하에서 가장 철저히 박해를 받아 온 집단
- 1980년대 이후 치열한 민주화운동: 그러나 단 한 명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를 만들어 내지 못함: 왜? 그리고 그 의미는?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하지 않는 40여 개의 나라 중에서 한국처럼 집요하게, 한국처럼 광범위하게, 한국처럼 무겁게 처벌하는 나라는 없음
- 2001년 초 ꡔ한겨레21ꡕ 보도 이후의 상황 전개
- 불교신자 오태양 씨의 선언
- 법원의 태도 변화
- 유호근, 임치윤, 나동혁 씨의 비종교적 양심에 따른 선언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에 대한 세 가지 반대 입장에 대한 검토
1) 국방부 등 안보논리: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해 주면 누가 군대가겠나?
- 누구나 가기 싫어하는 군대를 개선해야: 형평성, 인권, 처우, 복무기간
2) 한기총: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해 주는 것은 특정종교에 대한 특혜이다!
- 서구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의 역사는 곧 기독교 평화주의의 역사
- 왜 한국의 기독교는 국가주의, 군사주의와 밀착되었는가?
- 근대국가에서의 정교분리 원칙
-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을 인정해 주는 것은 특정종교에 대한 특혜가 아니라 특정종교에 가해진 국가권력의 부당한 박해를 거두는 것
3) 일반 예비역: 군대도 안갔다 온 것들이...
- 예비역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점
- 이유있는 분노, 잘못된 방향
- 대체복무제도란?

6. 맺음말: 여성과 군사주의
- 우리는 전쟁의 상처를 어루만지지 않고 전쟁을 기념하는 나라!
- 참전군인의 찢겨진 삶 / 참전군인 아내의 찢겨진 삶
- 여성들도 군사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 군대간 애인을 기다리는 여성들의 사이트
- 군대갔다 온 남자들을 선호하는 여성들의 의식
- 전쟁이나 군대, 남성성에 대한 추상적이지 않은 구체적인 접근 필요
- 군사주의를 해체해야 민주주의와 평화가 가능




<참고 자료>

그들은 왜 말뚝을 안 박았을까

군대를 갔다와야 사람이 된다?… 아직도 요원한 군사문화로부터의 해방


독자들이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아마 5&#52533;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0년이 되는 무렵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은 5&#52533;17. 우리는 연이어 이틀을 군사쿠데타의 망령 속에서 보내야 한다. 5&#52533;16이 일어난 1961년부터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1993년까지 우리는 장장 40여년을 군부독재 아래 살아왔다.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지 거의 10년이 다 돼가지만, 과연 이 땅에서 군부독재의 잔재는 청산되었는가? 과연 군부독재와 징병제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돼온 군사문화는 사라져가고 있는가? 불행히도 답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군사독재의 잔재는 이 땅에서 대단히 안녕하시다. 아니, 잔재, 즉 찌꺼기가 아니라 몸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공동여당의 한축을 이루는 자민련의 실질적 소유자인 5&#52533;16의 핵심인물은 불사조처럼 살아남아 민주주의를 짓밟은 반란의 동료들과 함께 어디서 이 날을 자축하고 있을 것이다.


70년대, 수많은 장교들의 미국 유학


최근 <한겨레21>의 지면을 뜨겁게 달군 양심적 병역거부의 문제에서 3년여의 도피생활 끝에 마침내 검거된 박노항의 병역비리에 이르기까지 군대와 관련된 문제는 언제나 우리 사회의 중요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미완의 혁명이 돼버린 1960년의 4월민중항쟁과 이듬해의 군사쿠데타 이래 30여년간 한국현대정치사는 군부와 학생의 격돌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으로 모든 사회운동 세력이 파괴된 이남에서 학생들은 유일하게 조직된 잠재적 정치세력이었다. 지식인이 정치를 담당하는 오랜 유교문화의 전통 속에서 학생들의 정치적 역할은 학생 자신들에 의해서나 사회에 의해서나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학생운동이 급격히 퇴조한 것은 동구사회주의권의 붕괴, 학생들이 점차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덜 갖게 된 것 등의 내외적 요인과 아울러, 그동안 학생들이 비정상적으로 대변자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민중운동의 각 부문이 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편 군부가 한국정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제3세계 일반에서 군부독재의 출현이라는 일반적 현상과 아울러 분단과 전쟁, 그리고 주한미군의 지속적 주둔이라는 한국의 특수성이 작용한 결과이다. 1946년 남조선국방경비대로 처음 출발할 때 6천명에 불과했던 군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당시 5만명,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8만여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에 군은 25만명으로 증가했는데, 정작 지금과 같은 60만명이 넘는 대군으로 성장한 것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이다. 이런 방대한 군은 1950년대에는 국가예산의 40% 이상을, 1980년대 후반까지 30%가량을 할당받아 물질적으로 한국사회의 다른 어떤 집단과도 비교할 수 없는 풍요를 누렸다.

한국에서 군이 급성장하여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던 것은 비단 무력을 장악하고, 무제한의 물질적 풍요를 누렸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이래의 상문천무(尙文賤武)라는 문인 우위의 전통을 지닌 유교문화 속에서 많은 지식인들, 또는 학생운동 세력은 군인들을 무식한 집단으로 얕잡아봤다. 1970년대 지식인들의 박정희에 대한 반감의 상당 부분도 그가 가난한 농민 출신의 군인이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1970년대 초반까지 장교집단은 한국사회에서 가장 교육수준이 높은 집단 중 하나였다. 1953년부터 1966년까지 해외유학인정 선발시험을 통과해 해외로 유학한 사람은 모두 7398명으로, 그중 86%인 6368명이 미국으로 유학했다. 그러나 이들 유학생이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비율은 6%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한국군 장교는 1950년대에만 무려 9천여명이 미국의 각종 군사학교에 파견되어 교육받고 돌아왔다. 물론 장교의 미국 연수기간이 일반 유학생들의 유학기간에 비해 짧았다고는 하지만, 군은 일반사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해외유학 경험자들을 보유했다. 또 사회에 재교육 기관이 거의 없던 시절 군은 육군대학, 국방대학원, 보병학교, 공병학교, 통신학교 등등의 방대한 자체 교육기관을 갖춘 유일한 사회집단이었다. 군은 또 정밀한 무기를 다루고, 최첨단의 통신과 수송수단 장악했을 뿐 아니라, 방대한 조직을 운영하기 위한 고도의 행정관리 체계와 기술을 보유했다. 한국사회에서 조직관리와 경영학의 개념을 가장 먼저 도입한 집단도 기업보다 군이었다.


한국군이 광복군을 계승했다?


그러나 한국정치에서 군부가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은 역시 미국과의 관계였다. 미국이 한국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막대한 자금을 투여해가며 직접 육성한 기관은 군밖에 없다. 육군사관학교의 모태가 군사영어학교라는 사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수많은 장교들의 미국 유학은 한국군과 미국간의 심상치 않은 관계의 한 증거일 뿐이다. 특히 군은 처음에는 유엔군 사령부, 1970년대 중반 이후에는 한&#8228;미연합사령부를 통해 주한미군과 일상적으로 접촉하는 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중진 국회의원들이 주한미대사관의 서기관급하고도 밥을 같이 먹지 못해 안달하던 것에 비하면, 고위장교 집단은 아주 안정적인 대미 접촉통로를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군부는 미국문화 도입의 중요한 창구이기도 했다. 한국사회에서 압도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미국문화의 유입에서 기지촌이 저급문화 유입의 통로였다면 군은 중급 내지는 고급문화 유입의 통로로 기능했다.

사관학교라는 특수한 교육경험을 공유하면서 선후배간의 관계로 얽혀 있는 군 장교들의 응집력은 한국사회에서 다른 집단의 추종을 불허한다. 상대적으로 많은 교육을 받았고, 응집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무제한의 물자와 인력을 사용하고, 무장력을 갖추었으며, 게다가 미국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군이 한국에서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60만 대군의 위용을 자랑하는 한국군에는 몇 가지 감추고 싶은 기억, 또는 현실이 있다. 짧은 지면에서 다 논할 수는 없지만, 한국군의 뿌리가 일본군과 괴뢰 만주군이었다는 점, 한국전쟁 당시 일패도지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는 점 등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경찰과 함께 군이 친일 인맥이 고스란히 보존된 집단이라는 것이야 이제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기 때문에 여기서 다시 군의 친일인맥을 들출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박정희 시절 육군참모총장이나 합참의장에 일본 육사나 만주군관학교 출신 등 확실한 친일경력자보다 당시 일반적으로 일제 강제동원의 피해자로 인식되던 학병 출신들을 많이 앉힌 것도 군의 친일 색채를 조금이나마 옅게 해보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있는 사실은 1990년대 들어 군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마치 한국군이 광복군의 정통성을 계승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는 점이다. 전쟁기념사업회가 &#43088;군의 정통성&#43089;이라는 부제를 달아 펴낸 <현대사 속의 국군>이란 책이 그 한 예이다. 광복군 출신들 중 군에 투신한 사람이 상당수 되지만, 한국군에서 이들이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본군, 만주군 출신에 밀린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광복군이 그토록 애타게 갈구하여 중국군으로부터 되찾은 작전지휘권을 한국군은 미군에게 맡긴 지 50년이 넘도록 찾을 생각도 안 하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한국군이 광복군의 맥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43088;연애편지&#43089; 국방장관의 여유는…


한국군의 또다른 악몽은 한국전쟁 당시 일패도지하여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었다는 것이다. 불패의 군대라던 미군도 한국전쟁에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 이북과 가장 어린 나라 중국을 상대로 승리하지 못한 채 전쟁을 끝맺었다. 이것이 베트남에서의 패배라는 더 큰 악몽에 묻힌 다음에도 두고두고 상처가 되어 미 군부의 이북에 대한 적개심의 원천이 되고 있듯이, 한국군에게도 한국전쟁 초기의 악몽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주월한국군 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은 한국군의 베트남전 파병 당시 만약 한국군을 파병하지 않으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베트남으로 빼갈 것이고, 미군이 철수하면 당장 이북이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에 한국군의 파병이 불가피했다고 강조한다. 필자는 이 주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군사력은 물론이고 경제력에서조차 이북에 크게 뒤져 있던 현실에서 있을 수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지난 수십년간 안보, 안보를 외치면서 국가예산을 물쓰듯 써놓고, 경제력에서 이북의 25배 규모에 이르렀다는 오늘까지도 주한미군이 없으면 당장 전쟁이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떠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린다 김 사건에서 단연 화제는 국방장관이던 양반이 린다 김에게 보낸 연애편지였다. 한 여자 정신과 의사는 마초사회 중 마초사회인 군에서 공군 출신이란 약점을 안고 합참의장에 이어 국방장관에 오른 이양호씨의 외로운 심리가 린다 김이라는 한국사회와는 다소 이질적인 여인에게 누구에게도 터놓을 수 없는 속마음을 토로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개인 심리분석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국방장관이라는 요직에 앉아 있는 사람이 집무실에서 연애편지를 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을 수 있게 만든 원인은 다른 각도에서 분석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


&#43088;정통관료&#43089;와 군사문화의 헤게모니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5월 계엄령하의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50여명의 국회의원이 탄 버스가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어 많은 국회의원이 국제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상투적인 누명을 쓰고 구속된 사건이 있었다. 당연히 이 사건으로 정국은 극한대치 상황에 빠졌다. 일치단결하여 전쟁을 수행해도 힘이 부칠 판에 어떻게 해서 이승만은 이런 폭거를 감행할 수 있었고, 야당은 또 이에 맞서 박터지게 싸울 수 있었을까? 그러고도 망하지 않은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다 미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직전 율곡 선생이 10만 양병론을 주장했을 때- 당시 인구규모로 본다면 오늘날의 60만 대군에 필적하는 엄청난 규모이다- 왜 조정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조공제(朝貢制)라는 중국적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안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믿고 기댈 곳이 있을 때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는 형성될 수 없는 법이다. 쉰살이 넘은 대한민국 국군이 진정한 성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군 수뇌부가 사춘기 소년 같은 연애편지를 외국 로비스트에게 보내는 현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외국의 로비스트는 주적이 아니니까 경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일까? 미군의 그늘 아래 있는 한 대한민국 국군은 진짜 강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국민들뿐 아니라 군이 자각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군사문화의 흔적은 도처에 널려 있고, 군사독재정권은 물러났지만 아직도 그 잔재는 전혀 청산되지 않고 있다. 장차관이나 고위공무원의 인사가 있으면 신문에 프로필이 실리는데 거기 자주 등장하는 말에 &#43088;정통 관료&#43089;라는 것이 있다. &#43088;엘리트 관료&#43089;란 말은 이해가 가지만 관료면 관료지 &#43088;정통 관료&#43089;란 말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참 이상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도 한국사회에 만연한 군사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유신 말기에 장교의 공급과잉과 진급적체가 군 내부의 큰 불만으로 대두되자 박정희는 대위급에서 전역희망자를 받아서 행정부처의 사무관으로 임명했다. 이른바 군화 신고 고급공무원이 된 유신사무관이다. 당당히 행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이 바로 &#43088;정통 관료&#43089;이다.

&#43088;정통 관료&#43089;라는 말이 공무원사회에 국한된 말이라면, 한국사회 전반에서 군사문화의 막강한 헤게모니를 대변하는 말은 &#43090;너, 군대 갔다 왔어?&#43091; 또는 &#43090;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43091;는 말이다. 물론 &#43090;군대 갔다 와야 사람이 된다&#43091;는 말도 역사적으로 나름대로 근거가 있다. 장교를 놓고 본다면 한국사회에서 군대는 출세를 위한 사다리였다. 가난한 농촌 청년이나 북에서 월남하여 남쪽에 이렇다할 기반을 갖지 못한 젊은이들은 군대를 통해 신분의 상승을 경험할 수 있었다. 사병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 일제의 강점과 전쟁의 참화를 겪은 대다수의 농촌 청년들은 문맹이었고, 전근대적인 인습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런데 군대에 가면 우선 글을 배울 수 있고 자동차, 무기, 통신장비 등 기계문명을 비로소 접하게 된다. 단체생활을 통해서 규율과 협동, 복종을 배우고 졸병들을 거느리면서 나름대로 통솔력과 지도력, 사람 다루는 법을 익히게 된다. 또 1960년대 초반에는 제대 군인들에게 농사기술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니 군대를 갔다 오면 사람이 달라져 오니 그런 말이 생길 법도 했다. 그러나 이는 1960년대 초반까지의 이야기이지, 대학교육이 일반화되어 고등학교 중퇴만 되어도 군대에 가지 않는 오늘의 현실에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징병제,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 인격과 인권을 차압당한 채 군대생활을 하다가 제대하여 이를 되찾아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천만에 말씀이다. 사람구실을 못하는 자가 군대 가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43088;사람&#43089;이 군대에 가서 &#43088;군인&#43089;, 그것도 인격을 차압당한 졸병이 되는 것이다. 국방의 의무는 신성하다고 말한다. 필자 역시 이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이견이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 국방의 의무를 사병으로서 수행한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군대생활이 신성했냐고? 이보다 더 썰렁한 개그는 없을 것이다. &#43090;너, 군대 갔다 왔어?&#43091;라고 물으며 군사문화를 확산하는 장교 출신들에게 반문해 보자. &#43090;당신, 사병생활 해봤냐?&#43091;고. 군대에서 가장 큰 욕이 &#43090;말뚝 박아라&#43091;이고, 제대하면서 군대생활한 동네를 향해서는 오줌도 누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다수인 현실에서 국방의 의무를 흔쾌히 신성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다.

민주사회의 표징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중 중요한 하나는 국가나 정부가 국민들을 훈육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이다. 거대한 훈육장으로서의 병영과 그 기반으로서의 징병제를 이제는 재검토해야 한다. 대통령만 민간인 출신이 된다고 군부독재의 잔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평화와 통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는 새 시대에 맞는 군의 역할과 규모, 위상, 그리고 군사문화의 청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어찌 예비군 마치고 민방위가 되어서까지 아직도 가끔 군대 꿈을 꾸고 찝찝하게 일어나는 우리 세대만을 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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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43088;병영국가&#43089;의 탄생

국민들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하는 ‘신성한 국방의무’는 어떻게 시작되고 유지되었나

우리 사회는 60만명이 넘는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지난 50년간 유지해왔으며, 이를 위해 막대한 군사비를 쓰고 있다. 이와 같은 과중한 군사비 부담은 당연히 사회복지와 교육분야의 희생을 강요했다. 한국에서는 1961년 박정희의 군사반란 이래 30여년간 군사독재정권이 유지돼왔다. 1990년대 들어와 민간정치인 출신이 대통령이 되어 군사독재는 종식되었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군사독재의 여독은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 군사독재의 여독을 제거하고,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국가주의와 군사주의를 청산하는 작업은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개항 이후 징병제 처음 소개

세계사에서 징병제가 수립되는 과정은 곧 근대국가의 발전과정이기도 했다. 중세의 군주는 봉건계급의 군사적 독점을 파괴하고자 독자적인 재원을 마련하여 자신의 군대를 사게 되었다. 군주가 봉건적 기사들이 이끄는 군대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마련한 재원으로 용병을 사게 되는 과정은 사실상 중세를 유지해온 정치질서를 근저에서부터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병행하여 국가재원이 확대되고, 군주권이 강화되면서 군주는 상비용병군을 거쳐서 상비왕군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 프랑스 혁명과 같은 정치&#8228;사회적 변화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민군대가 등장하게 된다. 프랑스가 신분의 차이를 넘어서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국민군대를 형성한 성과는 나폴레옹의 유럽 석권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여러 나라들은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시민계급과 농민계급에 많은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국민개병제에 입각한 징병제도를 수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에서 징병제도 발전의 역사는 한편으로는 참정권 등 시민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했다.

우리나라에 징병제도가 처음 소개된 것은 개항 이후 1881년 일본에 파견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에 의해서였다. 홍영식, 박정양, 어윤중 등 뒷날 개화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조사들은 국민개병제에 기반한 일본의 징병제에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고종에게 보고했다. 특히 어윤중은 양반을 포함한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국민개병제를 시행하여 상비군을 확보함으로써 강병을 도모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894년 12월에 반포된 &#43088;홍범14조&#43089; 중 제12조에서는 &#43090;징병법을 적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한다&#43091;라고 징병제의 시행을 예고하였다. 이렇게 징병제의 실시가 예고된 것은 당시 갑오경장을 주도한 유길준 등 개화파 관료들이 군제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한 것이다. 그러나 개화파 관료들과는 달리 고종은 징병제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군사력의 존재이유를 국토방위보다는 왕권유지를 위한 것으로 보았던 고종은 용병제로 모병한 병사들이 국왕에 대한 충성심이 더 강하다고 보았다. 더구나 동학농민전쟁 등을 거치면서 민(民)을 극도로 불신하게 된 고종으로서는 농민층이 주요 구성원이 되는 징병제를 검토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태평양전쟁과 함께 도입


고종은 민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는 않았지만, 대한제국 수립시 청나라에서 일어난 의화단의 난으로 정세가 복잡해진 상황에서 한때 징병제를 검토하게 된다. 고종은 1903년 3월 징병제 실시에 대한 조칙을 반포하였다. 고종이 추진하려 한 징병제는 국민개병적 성격을 지닌 징병제가 아니라 전통적인 병농일치제의 부활이었다. 군주나 국가에 의한 막대한 인적&#8228;물적인 자원 동원을 요하는 징병제도의 경우 최소한 묵시적으로라도 자원제공자들의 동의가 요구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생각한 병농일치의 징병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을 위한 정치체제의 개혁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았다. 대한제국 시기에 징병제는 끝내 실시되지 못하였다. 징병제가 실시되었다고 해서 국권을 수호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지만, 당시에는 군주와 지배층의 민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이외에도 열악한 국가재정, 호적제도의 미비, 중앙정부의 지방통제력의 한계, 국민교육의 부재 등 징병제의 실시를 가로막는 제약요인들이 많이 있었다.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의 대부분의 민족해방운동 세력들은 그 강령과 정책을 통해 징병제의 실시를 예고했다. 민족주의자나 사회주의자를 막론하고 국권상실의 아픔을 겪고 있던 민족해방운동 세력의 대부분은 당연히 전 민족적 총동원에 기초한 독립전쟁을 추구했다. 또 이들은 독립을 쟁취한 뒤에 세울 국가가 부국강병을 실현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19일자로 채택한 &#43088;대한민국임시헌법&#43089;에서 대한민국 인민은 &#43090;병역에 복하는 의무&#43091;를 진다고 규정하였다. 임시정부는 같은 해 12월18일 제정한 &#43088;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43089;를 통해 &#43090;만 20살 이상 만 40살 이하의 장건한 남자로 징병령에 의하야 징모된 자&#43091;를 중심으로 상비병을 편성한다고 규정하여 징병제도의 실시를 분명히 했다. 임시정부가 추진한 징병제는 중국과 러시아 동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그나마 제대로 시행될 수는 없었다.

이 땅에서 징병제가 처음 실시된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민족 지배하였던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였다. 일제는 1938년 2월22일 &#43088;육군특별지원병령&#43089;을 발표하여 조선인이 일본군에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이 단계에서는 아직 전반적인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가 지원병제도를 도입한 것은 병력자원의 부족을 메우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조선청년들을 &#43088;황군&#43089;에 복무케 함으로써 황국의식을 주입하려는 것이 주된 의도였다. 일제는 당시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징병제의 실시는 의무교육, 즉 &#43088;황민화교육&#43089;이 전반적으로 실시되고 나서 한 세대 이상이 지나야 가능한 먼 장래의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의도와 달리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병력자원에 대한 요구가 급증하자 일제는 1942년 5월8일 각의의 결정을 통해 1944년부터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된다고 발표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조선에 대한 징병제의 실시가 내선일체의 궁극적인 도달점이자 상징적 표현이라고 주장했지만, 징병제가 예상보다 빨리 돌연히 실시된 것은 일본인과 조선인 모두를 경악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한국전쟁, 무자비한 병력 동원


일제는 조선인을 징집하면서 조선인들이 &#43088;천황폐하&#43089;의 &#43088;황군&#43089;에 복무할 기회가 주어진 것은 무한한 영광이자 특권이며, 대동아공영권 내에서 &#43088;반도 동포&#43089;들이 &#43088;내지(內地=일본) 동포&#43089;들과 나란히 지도자적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나 이런 허황된 논리 이외에 실질적인 징병 실시의 대가는 주어지지 않았다. 일부 친일적인 조선인들은 이 제도를 징병제의 실시를 통해 &#43088;내선일체&#43089;(內鮮一體)가 완성된다면서 조선인들의 참정권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지만 그런 기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요컨대 일제가 강제한 징병제에는 조선인들에 대한 아무런 반대급부가 없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시기에 잠시 실시되었던 징병제는 이남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8월6일, 전문 8장81조 부칙으로 구성된 병역법(법률 제41호)의 공포를 통해 부활했다. 이 법에 따른 첫 징병검사는 1950년 1월6일에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징병검사를 마지막으로 징병제는 폐지되었다. 당시 미국은 한국군의 정원을 10만명으로 동결해두고 있었다. 이는 미국이 만일 이승만에게 국경경비와 국내 치안유지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병력 이외에 더 많은 병력을 쥐어줄 경우 이북에 대한 군사행동을 취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미국으로부터의 군사원조가 없이는 군대를 유지할 길이 없었던 이승만은 미국의 군 정원동결정책 때문에 1950년 3월 징병제를 폐지하고 지원병제를 채택했다.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국군은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다.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후퇴하여 부대를 수습했을 때 병력손실은 무려 45%에 달했기 때문에 막대한 병력 소요가 발생했다. 군이 본격적인 전시동원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1950년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였다. 당시 정부는 병역법과 임시 법령조치에 따라 제2국민병을 소집했다. 그러나 정상적인 소집이 이루어지지 않자 가두모집, 가택수색 등 강제징집과 소집을 통해 병력을 보충했다. 가두모집이란 실제로 길거리에서 젊은이들의 입대지원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길 가는 젊은이들을 군대로 잡아가는 것이고, 가택수색이란 말 그대로 집에 있는 사람들을 수색하여 잡아가는 것이다.

한편 정부는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1950년 12월21일 법률 제172호로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청년층을 대대적으로 동원했다. 국민방위군의 동원은 본격적인 징병제가 부활하기 이전의 일이었지만, 50만~60만여명의 장정이 동원되어 불과 100여일 만에 5만명이 굶어죽고 얼어죽고 병들어 죽는, 있을 수 없는 참사를 낳았다. 국민방위군 사건에 대해서는 본 난(362호)에서 자세히 다룬 바 있기 때문에 다시 서술하지는 않겠지만, 이 사건은 아무리 전시라지만 국가가 시민들을 함부로 동원하고 또 그런 국가에 대해 시민들의 견제가 시행되지 않을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가를 참담하게 보여준다.


베트남 파병으로 징병제 지키다


징병제는 1951년 5월25일 병역법 개정을 통해 다시 부활했다. 한편 전쟁으로 인해 국군의 정원을 10만명으로 동원하는 미국의 정책도 폐지되어 국군의 수는 1952년 10월 말 현재 25만명으로 늘어났고, 이때 한국과 미국은 국군의 정원을 46만3천명으로 증가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한번 가속도가 붙은 국군의 팽창은 급격히 이루어져 휴전 당시에는 55만명으로, 1954년에는 65만명으로 늘어났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피폐해진 상황에서 정부는 경제적으로 65만명의 대군을 유지할 능력이 없었고, 군의 유지를 위한 물적 자원은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의존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상황에서 미국은 과연 한국에 저렇게 방대한 규모의 군대를 유지할 필요가 있는가를 재고하기 시작했다. 당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재정균형을 이루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비대해진 한국군의 감군을 원했다. 미국이 한국군의 감축을 시도한다는 사실 자체는 이승만 정권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베트남, 라오스 등에 한국군을 &#43088;반공십자군&#43089;으로 파병하겠다고 제의하며 한국군의 감군을 모면하려 했다.

1960년대 들어와 미국의 케네디 정권은 미국의 막대한 군사원조 부담을 줄이고 재정균형을 맞추기 위해 한국군의 감군을 추진한 아이젠하워 정권과는 달리 제3세계 국가의 개발을 위해 자원이 군사부문보다는 경제부흥에 투자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한국군의 감군계획을 구체화했다. 한국군의 감군은 군사반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의 기반을 위협하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한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미국이 계획하는 한국군 감축을 피해보려는 것이 중요한 이유의 하나였다. 박정희가 미국과의 관계에서 베트남 파병을 통해 많은 것을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 분야에 관한 한 그의 목적은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이후 한국군 자체의 감군이 심각하게 논의된 적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1968년 1월21일 이북 특수부대의 청와대기습사건과 1월23일의 푸에블로호 나포사건으로 한반도의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자 한국군의 감군은 완전히 물건너간 일이 되었고, 박정희는 오히려 향토예비군을 창설하여 비대해진 군을 그대로 유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땅에 병영국가를 건설했다.

한국에서 징병제가 실시되는 과정에서 특기해야 할 일은 국가와 시민간의 계약에 기초하여 수립되어야 할 징병제도가 시민의 권리에 대한 별다른 고민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국가의 압도적인 우위 속에서 시행되었다는 점이다. 이민족 지배하의 일제강점기에도 시행되었던 징병제이기 때문에 국가나 시민들이나 징병제가 독립된 대한민국에서 실시되는 데 아무도 거부감을 갖지 않았다. 또 징병제는 대부분의 민족해방운동세력이 꿈꾸었던 제도이기도 했다. 더구나 시민들은 일제가 퍼뜨린 국가주의의 세뇌에서, 그리고 이를 끊임없이 확대재생산해온 독재국가의 &#43088;국민교육&#43089;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국민개병제는 빈민개병제?


현행 징병제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가 무제한으로 군대에 사람을 공급할 수 있는 체제하에서 사람의 가치를 찾을 길이 없다는 점이다. 불과 100여일 만에 5만명을 굶겨 죽인 국민방위군 사건은 과거의 일이라 하더라도, 1980년부터 1995년 5월까지 15년5개월간 군복무중 사망한 사람은 자살 3263명, 폭행치사 387명 등 모두 8951명에 달한다. 이는 연평균 577명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우리 군은 전쟁을 치르지 않고서도 3년마다 1개 연대 병력을 잃고 있는 셈이다. 걸프전 당시 미군쪽 사망자가 269명에 불과한 것에 비한다면 이같은 손실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 수 있다.

현역으로 근무하는 사람들은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기에 꼬박 26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제복을 입고 보내야 한다. &#43088;신성한 병역의무&#43089;라는 말과 달리 우리 사병들의 복무여건은 참담하다. 아무리 병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하지만 인생의 가장 찬란한 시기에 26개월이라는 긴 기간을 아무런 보상없이 보내야 하는 현역복무자들은 엄청난 박탈감을 안고 있다. 현역병에 지급되는 급여가 월 1만원선인데, 우리와 안보환경과 경제규모에서 유사한 대만의 사병들이 1개월간 받는 급여가 우리나라 사병들이 26개월 근무하고 받는 급여와 거의 비슷하다. 국가는 징집된 병사들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상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한국은 거의 완벽하게 이 의무를 방기해온 것이다. 병역의 의무가 신성한 것이라면 그들을 일당 400원, 시간당 17원짜리로 둘 것이 아니라 신성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악의 박탈감을 느끼지는 않을 정도로 대우해줘야 한다.

징병제도는 국가와 시민간의 계약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국가가 시민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면 국민병제도의 장점을 살릴 길이 없다. 더구나 바람의 아들,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등 특권층을 중심으로 병역비리와 기피가 판을 치고, 사람의 아들들과 어둠의 자식들은 현행 징병제가 국민개병제가 아니라 &#43088;빈민개병제&#43089;라고 비아냥거리는 현실을 언제까지 두고 볼 것인가?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 시민사회의 성숙, 경제발전, 남북관계의 개선에 걸맞은 병역의무를 시행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현행 징병제도를 근본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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