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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대중 문화가 ‘낭만화’하고 있는 성폭력과 죽음에 관한 몇 가지 생각들.
김현미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연구위원,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1. 성폭력은 ‘성해방’의 한 표현이다?

거미여성들(Spider Women)이라는 미국의 인터넷 여성주의 그룹(http://www.spiderwomen.org)은 1999년 8월에 열렸던 ‘우드스탁 뮤직 페스티벌(Woodstock Music Festival)'을 “강간스탁(Rapestock)"이라 부른다. 그들은 당시 우드스탁에서 여덟 건의 여성 강간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명만이 가해자로 기소된 이유에 대해 묻고 있다. 왜 500명의 안전 요원이 상주했던 우드스탁 콘서트에서 여성들이 옷이 벗겨지고 심한 성적 폭행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이 미디어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누가 이 사건을 축소시키고 은폐하기를 원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그들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우드스탁에 참가한 마흔 아홉 팀의 밴드 중 마흔 여섯 팀의 밴드가 모두 남성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 중에는 림프비스킷(Limp Bizkit)과 같은 랩 메탈밴드도 있었다. 그곳에 참가한 사람들 중 약 60%가 남성이었고, 40%가량이 여성이었다고 한다. 우드스탁에서 공연한 많은 밴드들은 흥분한 여성들에게 웃옷을 벗어 던지고 가슴을 드러낼 것을 부추겼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들은 흥분한 관중들 위로 던져지고, 그들의 옷은 찢겨나갔으며, 집단적 마초 트랜스(trance) 의례의 제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폭력’의 문제는 곧 잊혀졌다. 소위 저항성과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는 대중 문화의 현장에서‘ 성폭력’은 곧잘 ‘성해방’의 표현으로 번역된다. 바로 이점이 페미니스트가 표현의 자유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부분이다.
우리가 알다시피, 우드스탁은 전통적으로 젊음, 저항, 열정을 상징하는 미국의 대표적인 대중 문화 공연이다. 메이저 음반사에 의해 기획되고 상품화되는 기성 가수들에 비해 우드스탁에 모여드는 밴드들은 나름대로 언더그라운드적 저항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따라서 우드스탁은 주류 문화의 상품성과 제도적 규범에 대항하는 ‘생각 있는’ 뮤지션들이 모여드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소위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음악’을 추구한다고 주장하는 공격적인 밴드들이 성차별에 있어서는 어떤 식의 ‘성찰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즉 그들이 내세운 진보와 저항의 메시지는 종종 여성 혐오적이며, 성폭력적인 욕망을 부추기곤 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우드스탁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저항적 대중 문화의 현장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이다. 기성 세대를 비웃으며, 자신들의 문화적 감수성을 내세우는 ‘생각 있다는’ 밴드들의 공연에서조차 여성 비하가 자연스럽게 자주 표현되고, 여성 백댄스와 보컬들의 ‘섹시한 몸’이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 그들의 격한 몸짓이 공허하게 느껴질 뿐이다. 심지어는 대학의 응원가에서조차 ‘마초맨’이라는 노래가 당당하게 불려지고 있다.
남성 마초들이 주도하는 ‘저항성’은 자신을 규제하는 ‘잘 나가는 아버지’들에 대한 분노이며, 기성세대의 물적, 상징적 자원에 대한 삐딱한 냉소이다. 기성세대들이 제도와 자본을 통제하며, 힘을 얻고 있다면, 이들은 젊은이들의 감정과 몸을 지배하면서, ‘권력’을 얻고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들은 매력적이지만 ‘위험스럽다.’ 그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권력과 자원에 대해서는 냉소적이지만, 자신이 남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누리는 기득권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감각하다. 그러므로 젊음이 상징하는 ‘변화’와 ‘저항’이라는 의미가 과도하게 부여될 때, 대중 문화의 장에서 빈번히 행해지는 성폭력은 의도적인 범죄로 인정되기보다는 열정이 과다해서 또는 위선적인지 않은 욕망의 표현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시적인 ‘일탈’로 취급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중 문화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유통되는 ‘현장들’에서 성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폭력의 문제는 더 드러내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여성들도 시대적 유행에 동참하고, 세련된 취향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대중문화가 생산해 내는 ‘성적 폭력’들에 대해 관대하다. 촌스럽거나 완고한 도덕주의자로 보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곧잘 ‘표현의 자유’에 동참하고, 모든 ‘규제 세력들’에 대해 적대적이 된다. 또한 문화적 표현물에 대해 사사건건 성차별과 억압을 논하면, 주류 문화 담론에서 곧 아웃(out)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다. 대학가의 여성들이 노골적인 여성 비하를 만화 속에 표현해냈던 이현세를 지지하고, 나쁜 남자의 김기덕 감독을 감각 있는 영화꾼으로 평가하는 것도 ‘최첨단의 문화 유행’을 수용하기 위해 여성 폭력에 대해 눈감아 버리겠다는 ‘선택’일 수 있다. 그러나 대중 문화 속에서 ‘모욕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여성이란 기호는 단지 상상적이거나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바로 현실 속의 여성이다. 미성숙한 자아를 지닌 누군가의 욕망으로 인해, 여성의 삶이 제한되고, 도구화되는 것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 가장 진보적인 형태의 문화 정치학이다.

2. ‘죽음’은 오락이다?

대중 문화는 새로움과 차이를 통해 잉여를 만들어낸다. 최근 죽음은 대중 문화의 주요한 아이콘이 되고 있다. 이제 죽음은 ‘신비스럽거나’ ‘두려운’ 현상이 아니라, 보고, 즐길 수 있는 오락의 대상으로 적극 활용된다. 인터넷 자살사이트처럼 죽음에 대한 과감한 실험 정신이 새로운 ‘욕망’으로 변화되면서, 죽음은 점점 ‘낭만화’되고 있다. 이를 통해 죽음은 이제 개인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선택될 수 있는 사건이며, 그러한 죽음의 과정을 계획하고, 실행하고 남과 공유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죽음의 낭만화'가 가장 활동적이고 생명력이 있는 신세대(Youth Culture)의 하위 문화로 자리잡게 되는 것도 최근의 현상이다. 죽음은 대중 문화와 결합하면서, 영상, 음악 그리고 인터넷의 세계에서 언설의 영역을 빠르게 확장시켜내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 관계의 도구화나 삶의 의미 없음, 외로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분노 등은 타자에 대한 공격성으로 표현될 뿐 아니라, 자신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도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넷 리니지와 같은 오락 게임처럼, 괴물과 싸우던 플레이어들이 다른 플레이어를 죽일 뿐 아니라, 혈맹과 혈맹끼리도 전투를 벌이는 ‘살인’ 경쟁이 게임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살인 경쟁의 승리자가 게임의 ‘고수’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살인과 죽음에 통달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게이머로서의 ‘지위’를 얻게 되는 셈이다. 어떤 엽기 사이트는 탈격이 주는 풍자와 해방감으로 인해 신선한 웃음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목이 순식간에 달아나고, 육체의 일부가 절단된 많은 시체들이 ‘신선한 아이디어’라는 명목 하에 버젓이 시각적 폭력성을 행사하는 사이트들이 넘쳐나고 있다. 또한 록의 저항성을 ‘죽음'과 연결시키는 ‘death metal' 장르의 전 세계적인 확산은 악마적 이미지를 낭만적 저항성과 허무주의와 연결시키면서, 새로운 취향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하드코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영화들은 잔혹한 죽음의 과정을 냉정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자세히 드러내고 있다.
이렇듯 대중 문화에 ‘죽음'의 이미지가 적극적으로 차용됨으로써 죽음은 ‘윤리'와 ‘고통'의 문제를 수반하기보다는, ‘오락'과 ‘쾌락'의 영역이 되고 있다. 죽음 앞에서 인간들이 보여왔던 경건성은 사라진지 오래다. 죽음과 폭력, 그리고 쾌락은 이제 서로 떼어낼 수 없는 ‘3대 히트 상품’이 되고 있다. 이미지든 실제든 죽음의 고통이 누군가의 잠시 잠깐의 흥분과 오락을 위해 조장되는 것에 대해, 자주 실망하고 절망한다. 정말 소박하게, 살아있음을 인정하고 마음과 육체의 ‘평화’를 상상하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가? 왜 쾌락과 오락은 점점 ‘파괴’와 ‘폭력’으로만 표현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이러한 대중 문화의 소비자들이 재현되고 있는 폭력성을 그대로 내재화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죽음의 낭만화가 시대성을 반영하며 유행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 예로 갱스터 랩(gangster rap)을 만들어내는 한 미국의 레코드 회사의 프로듀서들이 실제로 갱의 멤버로서 살인을 저질렀던 사건은 ‘문화’와 ‘현실’의 상호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낭만화를 기반으로 한 대중 문화는 인터넷과 방송매체, 문화 상품의 유통망을 통해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빠르게 확산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켜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 우리는 대중 문화에서 재현되는 죽음의 낭만화가 21세기 후기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객기와 삶에 대한 무기력은 폭력을 찬양하고, 죽음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어내고 있으며, 집단적 무감각증을 생산해내고 있다. 죽음과 같은 더 강한 자극과 충동을 통해서만 ‘유희’의 느낌을 갖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은 그만큼 삶의 ‘평화로운 느낌’을 포착해줄 감성과 감정의 촉수들이 죽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바로 이점 때문에 대중 문화를 ‘인간화’하려는 노력은 일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주요한 실천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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