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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교육

적, 여성, 섹슈얼리티


김엘리 ꠾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정책위원장 (2002.11.7)



본 글은 전쟁담론이나 적의 이미지 창출에서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차용되고 있으며, 여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재현되고, 해석되고 있는지 살피는 데 있다.


1. 티셔츠의 그림 이야기: 정복의 욕망

며칠 전 송탄을 방문했다. 지난 8월, 서울 국제회의의 한 프로그램으로 참가자들이 송탄의 오산 미군기지촌을 돌아본 일이 있는데, 그 때 눈여겨 본 한 티셔츠 도안이 나의 맘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점 문 밖에 길게 늘어뜨려져 전시되어 있는 그 티셔츠 도안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넋을 잃은 사람처럼 한동안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아쉽게도 상점 문은 잠겨 있었다. 그렇게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두 번째 방문은 다행히도 상점의 사장과 만날 수 있는 호기를 가졌다. 여전히 길거리의 한 켠을 장식하고 있는 이 티셔츠 도안은 날 다소 흥분시켰다.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한 여인의 벌어진 사타구니 사이로 각 각의 비행기들이 목표를 조준하고 깊고 낮게 침투하고자 활공하고 있는 이 도안의 이미지는 여전히 우리네 삶의 한 재현으로서 버젓이 세상의 한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내가 왜 이 이미지에 집착하며 이 도안과의 재상봉을 그렇게 간절히 원했는지 그 그림 앞에서 바짝 타는 입술의 긴장감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그 상점의 사장은 다소 싱거운 얼굴로 날 마주 대하고 있었다. ‘여자가 왜 여기 왔지?‘하는 약간 재미없는 눈빛으로 의아함을 표현하였다.

“한국사람들이 이 티셔츠가 왜 필요하죠? 이건 미군들이 부대별로 구분하면서 입는 유니폼 같은 거예요.”
“미군들이 이것을 입나요?”
“그럼요, 다같이 맞추어서 입지요. 이 비행기가 다 모양이 다르잖아요. 이것이 각 부대를 구분할 수 있게 하는 거죠.”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이 군인으로서 본분을 다하고 명예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벽이나 수첩에 부쳐둔 핀업 걸들의 사진들이었다. '금발의 미인들은 군인들로 하여금 왜 이 전장에 내가 있어야하는가를 상기시켜주고 힘을 주며, 이 어려운 상황에서 견뎌내게 하는 존재였다’고 회상하는, 퇴역한 한 미국남성의 말은 <Q논픽션> 케이블 텔레비전의 핀업걸에 관한 다큐멘터리 방송에서 인용한 것이다.
군대(인)와 여성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밀접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점 점 노골적이고 직접적이며, 보다 더 강렬한 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일게다. 나신의 여성에게로 침투하는 것이 곧 적의 진지로 향하는 전투의 짜릿함으로 재현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 재현은 티셔츠나 사진이라는 상품을 통하여 유통되고, 이미지가 보여주는 의미는 이러한 유통과 소유의 과정에서 재구성되고 결정되고 확산된다 존 버거, 「이미지: 시각과 미디어」, 서울: 동문선, 2002 (원본은 1972년 출판) ; 아네트 쿤, 이미지의 힘: 영상과 섹슈얼리티, 서울: 동문선, 2001 (원본은 1995년 출판)
. 자, 군인들이 여성의 나체 그림이 든 티셔츠를 집단적으로 입고 걸어간다고 상상해보자. 참으로 웃기는 일이지만, 잠시 웃음을 참고 생각해본다면, 이 유치함이 갖는 정치적 의미의 무게는 단순히 세상의 유치함으로 또는 상식 이하의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압도적이다.

우선, 집단적 정체성을 표방하고 있는 공통의 티셔츠를 착용함으로써 그들은 동일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것은 남자라는 것, 전사라는 것, 같은 부대의 소속이라는 것, 그리고 그들은 죽음의 운명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남성성이라고 하는 특성으로 특징화된다. 그들은 민족 또는 한 사회의 시민권을 온전히 가지는 주체로서 남성적 연대감을 형성하며, 고귀한 애국심으로 어린이와 여성, 일반인의 안보를 지키는 선한 수호자이다. 따라서 그들이 갖는 남성성은 개별적 남성의 특징이 아닌, 집단적으로 발현되는 남성 특권적 권력으로 작동한다.

벌거벗은 채 누워있는 글래머 여성의 이미지는 이러한 집단적 남성의 시선에서 고정화된다. 이미 누워있는 여성은 자신의 의지와 주체성이 은폐된 채, 남성을 위해서 준비되어진 여성이다. 플레이보이나 펜트하우스의 핀업 사진이나, 지하철 가판대의 잡지 모델에 박혀진 글래머형의 여성이미지는 대량 생산된다는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한다면, 극단적 성적 여성성이 표출된 여성의 재현은 현실적으로 남성들이 갖지 못하는 욕망을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이 욕망은 그 티셔츠나 사진을 구입하여 소유하는 욕망으로 대치된다. 여성의 재현은 유통되고 소유되는 상품으로서 하나의 교환가치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군인이 소비자일 경우에는 국가적 차원에서 민족주의적 의미가 창출된다. 전사들을 위로하는 여성, 위험한 전투의 황량함이 오르가즘의 짜릿함으로, 배출의 즐거움으로 환상을 갖게 하는 여성이 민족주의적으로 필요하다. 다리를 벌리고 ‘자, 나를 가지세요. 그리고 이렇게 잘 겨냥해보세요’라고 말하는 여성이 국가적으로 요청된다. 그것은 전투력의 향상과 국가의 안보를 위하는 애국적 행위이다.

적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은 여성을 정복하고자 하는 욕망과 만난다. 이러한 욕망은 사실, 군대의 현장에 있는 남성에게만이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남성의 판타지이다. 한 비뇨기과 의사가 성의학 입장에서 남성들에게 전하는 섹스방법에 관한 글에서 이를 엿보기로 하자.

한국남성들의 성행위는 흡사 ‘전투’와 비슷하다. 그것도 ‘장기전’이나 ‘전면전’이 아닌 ‘속전속결전’이다. ‘선전포고’도 없이 일단 시작하면 순식간에 해치워버리고 만다. 이는 경쟁이 치열한 한국사회에서 ‘전투적’으로 살아온 한국남성들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 (중략)...... 최소한 아내에게 ‘선전포고’는 해야할 것 아닌가. 그러나 때로는 선전포고를 해놓고도 싸움다운 싸움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발기부전과 조루가 대표적이다 (이선규, ‘남성학 강의: 선전포고하고 전쟁해야지’에서) http://newsmaker.hkan.co.kr/leports/n367g0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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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글은 섹스를 전투로 비유하여, 한국남성들의 성질 급한 섹스의 습관과 경향을 ‘속전속결전’로 규정하면서, 아내를 위한 배려로서 전희, 즉 ‘선전포고’를 권유하고 있다. 선전포고는 전쟁을 치루는 법칙의 예의인 것처럼 아내에게도 느긋한 자신감으로 섹스를 준비할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이 글은 섹스의 중심을 남성의 성기에 두고 마치 목표달성을 위하여 분기 투쟁하는 장면을 연상케하면서 섹스는 남성적인 사업의 연장선으로 취급하고 있다. 여기에는 정복과 성공, 성취라는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다. 이렇듯, 섹스를 전투의 과정으로 설명을 하여야 쉬운 설득력을 갖는 남성세계는 이미 전쟁이 그들의 일부임을 보여준다.

티셔츠의 그림이야기에서 시작된 섹슈얼리티와 이를 통한 여성의 이미지 재현 문제는 다음의 물음과 함께 계속될 것이다. 과연 군인이 군인답게 되는 주요한 기제로서 어떻게 여성이 인식되고 이미지화되는가? 전쟁담론에서 여성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쟁담론에서 섹슈얼리티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 그리고 전쟁을 섹슈얼리티로 이미지화함으로써 여성성과 남성성이 어떤 정치적 효과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을 통해서 전쟁담론에서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차용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여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해석되고 있는지 보고자 한다. 먼저 전쟁담론을 주요하게 형성하는 ‘적’의 이미지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고자 한다.


2. 부시의 반테러리즘 정책과 적의 창출

1) 부시의 테러리즘과의 전쟁

군사주의는 적을 필요로 한다. 전쟁과 군대가 성립되고, 존속되기 위해서는 ‘우리’와 다른, ‘타자’로서의 적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911 참사가 일어난 후, 미국 부시는 이에 대한 보복전쟁을 선언하면서 세계적 지지를 호소했다. "너희들이 나와 함께 하지 않으면, 너희들은 적이다. (You're with us or against us.)" 세계적 협조를 요청하는 건지, 위협을 하는 건지 애매한 부시의 이 유명한 발언은 2002년 미국의 새해 국정연설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이란, 이라크, 북한을 악의 축으로 명명하면서 세계를 아군-적군, 선-악의 이분법적 구도로 분리시켰다. 그리고 마치 세계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자와 이를 위협하는 자와의 대립으로 극대화시켰다.

그리고 실로 세계는 ‘테러리즘과의 전쟁’이라는 기치아래 마치 준전시체제의 긴장과 불안감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듯하다. 이라크와의 전운이 감돌고, 그 다음 차례는 북한이라는 예정설과 함께 필리핀,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에서 일어나고 있는 테러사건들이 더욱더 이 전쟁의 근거와 의미를 확고하게 다져주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현재 팔레스틴, 아시아 등에서 발생하고 있는 여러 가지 폭발사건은 미국 행정부가 명명하는 ‘테러’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이의 정치적 의미는 미국행정부가 명명하는 ‘테러’와는 사뭇 다른 사회 역사적 맥락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집단간의 사회적 갈등과 소수 종족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된 저항은 미국의 독점권과 불균등한 세계질서에 관한 저항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도대체 미국이 정의하는 테러리즘이란 무엇인가? 미국정부가 테러리즘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는 ‘적’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배치되어 인식되고 있는가하는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런데 ‘테러리즘이란 무엇인가’라는 정의는 태생적으로 보편적일 수 없는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테러행위 자체가 일반적 범죄와 다르게, 정치적 행위라고 개념화됨으로써, 누구의 입장에서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읽는가에 따라 그 정의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일제시대, 안중근의 도시락 폭탄 투하 사건은 일본측에게는 테러행위이지만, 한국인들에게는 독립을 위한 애국적 영웅행위이다. 어떤 시각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 그 행위는 전혀 다른 해석을 동반한다 2002년 5월, 스위스에서 개최된 유엔 인권위원회에서도 이슬람의 자폭문제를 테러로 볼 것인지, 자위권으로 볼 것인지에 대한 시각 차이를 지역별로, 국가별로 드러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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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테러리즘의 정의는 테러리즘에 대한 정책 방향 제시에 주요한 관건이 된다. 미국정부는 테러리즘을 다소 광범위하게 정의하고 있다. “국가하부집단, 또는 비밀요원이 비전투원에 대해서 행하는, 정치적 동기에 의한 계획적 폭력행위”라고 본다. Perl, 위의 글, 2001 CRS-3.
연방수사국(FBI)은 “정치적, 사회적인 목적을 위하여 정부, 국민 전체 또는 일부를 위협, 강요하는 사람 또는 물건에 대한 불법한 실력 또는 폭력의 행사”라고 정의한다.

테러리즘을 정의하는 데 공통적으로 간주되는 요소는 (1)정치적 동기 (2)민간인에 대한 공격 (3)불법적인 폭력행사 등이다. CIA의 반테러리스트 센터의 부원장으로 일한 바 있는 필라(Pillar)는 이를 다음과 같이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http://www.terrorismanswers.com/terrorism/introduction.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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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분노의 충동적인 행위이라기 보다는 미리 계획되어진 행위
(2)돈을 얻기 위해 마피아를 이용하는 집단들의 폭력과 같은 범죄가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질서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루어진 정치적 행위
(3)군사적 목표나 전투부대가 아닌 시민을 겨냥한 행위
(4)한 국가의 군대가 아닌 국가보다 낮은 집단들(subnational groups)의 행위

그런데 펄(Perl, 2001)은 이러한 정의가 전통적 개념에 머물려 있다며, 현재의 상황을 충분히 담고 있지 못하다고 지적한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테러리스트들은 하나의 집단으로만 구성된 것이 아니라 여러 집단들이나, 조직화된 비집단의 멤버 또는 개인들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모든 테러리스트들의 행위가 정치적 이유에 의해만 동기 부여되는 것만이 아니라 종교 문화적인 동기, 경제적인 이익에 의해 폭력을 행사한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이는 테러리즘의 양상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적 국가의 역할과 영토의 개념이 점차 모호해지는 가운데, 전쟁의 주요행위자는 국가만이 아닌, 다양한 정치적, 이념적, 문화적 집단들이 되고 있다. 그 방법에 있어서도 911 사건처럼 ‘틈새기술을 이용한 비대칭적 수단’으로 최병두, “세계화와 초테러리즘의 지정학”, 「당대비평」, 봄호 18권, 2002: 198-200.
맞서고 있다. 더욱이 테러행위의 상징성과 심리적 위협감이 지닌 상당한 영향력과 효과는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 전쟁의 한 유형으로 취급해도 무방할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테러리즘이 주는 위협감을 넘어서 더 위압적인 것은 911사건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대응책이다. 아프간에 대한 과도한 공격 2001년 12월 현재, 아프간의 사망자 수는 3,767명으로 집계된다. 그리고 미군의 무차별적 공중폭격과 오폭은 60명의 북부지역 추장을 태운 트럭까지도 피해대상으로 삼았다.
과 불량국가들의 대량살상무기 위협의 과장된 강조, 그리고 반테러리즘을 위한 다양한 수단들 미국의 반테러리즘 정책의 기본 틀은 제재를 위주로 하거나 테러를 지원하는 국가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골자로 하여왔다. 그런데 최근 미국의 안보관련 정책입안자들은 1)세계각국의 협력을 끌어내는 외교정책, 2)반테러법, 안보법 등 법의 강화, 3)테러리스트들의 활동 자금 통제와 물자지원 금지, 4)테러리스트 통제와 제거를 위한 군사적 조치, 5)정보 수집 등 다각적이고 상호통합적인 대응책과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Perl R. F. "Terrorism, The Future, and U.S. Foreign for Congress". (Nov. 5, 2001); Taylor F.X. "Terrorism: U.S. Policies and Counterterrorism Measure", (Dec. 1, 2001) 참조.
의 정책화의 실행으로서 반테러법의 국회 통과는 미국의 패권질서 유지를 위한 정치성을 그대로 노출시킨 셈이다. 더욱이 인권의 차원에서 볼 때, 부시행정부의 이러한 대응들은 논란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캐나다 국경 강화, 이민자들의 단속, 개인의 언론, 통신 자유권 제약 등은 미국이 내세웠던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흔들기에 충분하다.

뿐만 아니라 테러리즘의 정의를 모호하게 만들고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가중시킨 것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 선포이다. 부시는 테러리스트와 이를 지원하는 자들을 구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며, 이를 전쟁의 행위라고 규정지었다. 부시와 미 행정부가 아프간을 공격하고, 소위 불량국가들을 악의 축으로 명명한 것은 테러 지원국들에게 가하는 엄포였지만, 이는 테러와 전쟁을 모호하게 만든 결과가 되었다. 테러가 폭력적이고 무고한 민간인의 피해를 가져온다는 점에서는 비판을 면할 수 없지만, 부시행정부가 자행하는 전쟁, 역시 폭력적이고 수많은 살상을 초래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부시행정부는 그들의 목적이 테러리즘과 차별되는 도덕적 우위성이라고 주장할지 모르지만, 과연, 미행정부에게 누가 세계평화와 자유와 정의의 기준을 주었는지 의심스럽다 911사태가 발생한 후, 미국 정부는 911테러는 온 인류의 자유와 평화에 대한 도전이라고 강조하여왔다. 테일러(Taylor)도 그의 글에서 911사태가 단순히 미국에게 가한 일격으로 간주될 것이 아니라, 온 인류와 문명자체에 대한 공격이었다고 말한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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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8월, 뉴욕파트 애비뉴 유대교당에서 전 미 국무장관인 조지 슐츠가 한 연설은 이대훈, “9-11 사건과 테러리즘이라는 속임수에 대한 단상”, 2002, 9. 재인용.
미국이 테러리즘을 어떻게 보는가하는 점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세계 문명과 정의의 중심이 미국에 있다는 자국중심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테러리즘은 현대적 야만이다.” “테러리즘은 서구문명에 대한 위협이다.” “테러리즘은 서구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다.” 이러한 발언에는 테러리즘이 왜 발생하는가, 테러리즘의 주요 대상이 왜 미국이어야 하는가하는 성찰은 전혀 담겨져 있지 않다. 그저 테러리스트(적)들은 짐승과 같은 야만인으로서 위협적인 성가신 존재에 불과하다는 점을 역설할 뿐이다. 이는 테러리스트들을 왜 제거해야 하는가하는 정당성을 합리화시키데 그치고 있다.

2) 적의 창출 이 내용은 본인의 글 “한국의 군사주의와 성” 「여성과 평화」, 2002. 2호의 2장의 일부를 수정한 것이다.


세계가 군사적으로 이원화되고, 새로운 적이 끊임없이 창출되는 이 때에, 눈여겨 볼 점은 군사주의의 메카니즘이 적을 만들고 적에 대한 증오심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인간을 폭력적으로 황폐케 만드는가 하는 점이다. 왜 이슬람세계는 서구문명을 위협하는 야만인으로 전락되는가? 일반 민간인들을 군인으로 바꾸고, 죄의식 없이 적을 죽이고, 나아가 그런 행위를 애국심으로 전환하는 기제는 과연 무엇인가?

킨은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와 도구적 인간(Home faber) 못지 않게 인간은 적대적인 인간(Homo hostilis)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면서 라틴어 ‘hostis’라는 말은 내부인(insider)이 아닌 이방인(stranger)이라는 말에서 유래한다고 설명한다 Keen Sam, Faces of the Enemy, NY: Haper & Row, 1988, 18쪽.
. 혈연이나 종족으로 맺어지지 않은, 우리와 관련이 없는 사람으로부터 느끼는 다름과 두려움이 갈등을 일으키고, 이는 적개심으로까지 발전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다름과 낯설음에서 오는 갈등, 이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하는 점인데, 인간의 역사는 이를 ‘안보’라는 이름 하에서 남성적 힘과 군사력으로 해결하여왔다. 그리고 이러한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로서 신화가 창조, 유포된다.
신화는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우리의 정체성을 규명한다. ‘우리’는 타자를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본다. ‘타자’는 ‘우리’의 부정어이고, ‘우리’의 정체성은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확인된다. 그리하여 누가 우리의 편이고 선하고 강한 존재인지를 밝힘으로써 우리 편인 아닌, 낯선이(stranger)를 죽이는 것을 거룩한 행위로 만든다. Keen Sam, Faces of the Enemy, NY: Haper & Row, 1988, 19쪽.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문명세계의 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 것으로 선전되면서 이슬람권의 폭력적 야만성을 강조하는 언론보도에는 이러한 신화가 숨어있다. 국민의 기아에 무책임한 채 대량살상무기만을 보유하고 있다는 북한에 대한 비난발언에도 미국과 그의 동맹국이 얼마나 평화와 인권을 위한 선한 존재인지 그 신화가 담겨져 있다.
우리 / 선 / 거룩함 / 내부인
그들 (적) / 악 / 이단 / 이방인
우리는 법 안에 있다.
그들은 범죄자이다.
우리는 계약과 조약, 국제법을 준수한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만하고 조약을 파괴한다.
우리는 평화를 수호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군사력은 법과 질서를 보호하기 위한 업무이다.
그들은 난폭한 갱이자 범죄집단이다.
우리는 정의와 시민권을 지킨다.
그들은 그들의 국민들에게 야만적이고 억압적이고 전제군주적이다
우리는 외국에게 도움을 제공한다.
그들은 혁명과 혼란을 부추킨다.


3) 적의 이미지

적의 이미지는 참 다양하다. 몇가지 특징 별로 본다면 다음과 같다.

1) 적은 잔인하다. 폭력적이다. 양심이 없다. 험악하고 무섭다. 그리고 욕심이 많다. 그래서 ‘적’은 우리의 가정의 안전을 항상 위협하는 위험한 존재이다.

2) 적은 문명에 뒤떨어진 야만인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의 이미지는 흑인이 원숭이보다 못하다는 차별적 선입견과 함께 흑인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재현되고 있다. 인종차별과 적의 개념이 맞물리는 지점이다.
그림 <똘이장군> 중에서

3) 적은 짐승으로 표현되고 있다. 주로 쥐, 뱀, 토끼 모양의 형상을 띠고 있다. 북한이 국가정보원에 의해 양을 탈을 쓴 늑대라든지, 잘 보이면 보이는 도마뱀의 꼬리라든지, 뿔달린 도깨비, <똘이장군> 만화에서 돼지 등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도 그 한 예이다.

4) 적은 성적 유혹자이자 강간자이다. 순결한 여성을 강간하는 적의 이미지는 마치 민족의 순결을 빼앗고, 정의와 자유를 파괴하는 자라는 이미지로 확대 해석된다.

적이 인간 이하로 그려지거나, 짐승으로 형상화됨으로써 ‘우리’는 쉽게 적을 증오할 수 있고, 죽일 수 있다. 적은 마음대로 죽여도 좋은 쓰레기 같은 존재이고 악마와 같은 존재이다. 만약 적이 나와 같은 인간으로 이미지화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적대감을 갖거나 쉽게 총을 들이댈 수 없을 것이다. 적에게 우리는 인권을 찾을 수 없다. 그들은 비인간화되고 타자화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접근한다면, 이러한 적의 이미지는 ‘우리’의 그림자가 투사된 것이라고 본다. 융이 말하는 그림자는 자아가 모르고 있는 무의식의 일부인데, 일차적으로 열등한 인격, 나의 부정적인 어두운 면이다. 적은 우리가 인정하고 싶지 않는 열등한 면을 집단적으로 투사한 악의 원형이다. 그리되면 적은 일종의 괴물로 보이며, 이 괴물을 죽이고 약한 자들을 구출하는 영웅적 행위는 자기희생, 성전, 민족 해방 등의 이름으로 합리화되어진다. 유태인의 학살, 마녀사냥, 매카시 열풍, 좌익색출 등은 일종의 그림자의 집단적 투사의 예이다. 따라서 진정한 평화는 개개인의 무의식에 있는 그림자를 인식할 때, 집단적으로 투사한 악의 원형의 영향에 휩쓸리지 않을 때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이부영, 「우리 마음속의 어두운 반려자, 그림자」, 서울: 한길사, 1999.



3. 적의 이원론적 구조와 여성 이는 2002 서울국제회의에서 발표한 “군사주의, 여성, 탈군사화를 위해서‘ 발제문의 일부이다.


선-악, 강-약, 문명-원시라는 이원론적 구도에서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남성=보호자, 여성=피보호자라는 이분법적인 구도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의존도가 강화된다. 안보의 주체자가 되지 못하는 여성들은 사회의 온전한 시민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없다. 이러한 점은 전쟁과 관련된 포스터나 만화에서 여성을 적으로 그리지 않는다는 킨의 지적에서도 Keen Same, 위의 책, 58쪽.
찾을 수 있다. 사실상, 여성은 역사적으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이나 전쟁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적’으로서 여성을 명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성을 안보의 주체자로 상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대상으로 전투를 한다는 것이 영웅적 명예를 절하시키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군사적 이원화와 적의 창출은 여성을 타자화시킨다. 일례를 들면, 아프간 전쟁동안 아프간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문제는 미국에게 정당한(just) 전쟁의 하나의 구실로서 전면에 부상되었다. 반전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들의 반인권적인 상황은 전쟁반대의 주요한 모티프가 되었다. 그러나 그 전쟁담론에는 진작 아프간 여성의 삶과 경험은 존재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탈레반 정권의 원시적인 야만성을 증거하는 상징으로 활용되었을 뿐이다. 그들은 억압적이라고 ‘규정된’ 이슬람문화에 의해 출입도 자유롭지 못하고, 정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돌매맞는 불쌍한 피해자로 이미지화 되었다. 실질적으로 새로운 이슬람정권의 구성과정에서 아프간 여성의 목소리는 여전히 주변화되었다. 그들의 목소리를 정치적 영역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움직임은 그동안 생명을 걸고 투쟁을 해왔던 여성들의 노력에 의해 전개되고 있을 뿐이다 북부동맹의 카불 진입과 관련, 북부동맹의 보수적 남성성을 비판하고, 이슬람 중심의 정권구성보다는 유엔이 개입한 보다 광범위한 민주적 정권 구성을 제안하는 아프간여성혁명연합 (RAWA)의 성명서와 탈레반 추출 후, 여성의 목소리를 정치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활동과 입장에 관한 2002년 3월 8일 여성의 날 성명서 참조. http://www.rawa.org
.

셋째, 전투에서의 ‘적’의 정복은 극단적 남성성의 표출을 필요로 함으로, 강한 남성다움이 사회의 우위적 가치로 자리잡는다. 전쟁과 관련된 어떤 것을 말할 때, ‘정복, 강인함’과 같은 이야기들은 남성적인 것으로 고려되면서 칭송되는 반면, ‘동정, 약함, 패배’와 같은 이미지들은 여성적인 것으로 비유되면서 하찮은 것으로 간주된다. Cohn C. "Wars, Wimps, and Women: Taking Gender and Thinking War", in M. Cooke and A. Woollacott, eds, Gendering War Talk, Princeton, New Jersey: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3
여성성을 폄하하고 남성성을 권위적이고 가치있는 것으로 부여하는 남성성의 우월의식은 전쟁의 과정과 승패를 묘사하는 은유법에서도 표출된다. 지난 걸프전쟁 당시, 공격은 강간으로 표현되고 (the rape of Kuwait), 이슬람교 식의 절을 하고 있는 사담 후세인의 들려진 엉덩이 뒤로 미사일이 꽂힐 듯한 그림은 침략의 굴욕성을 강간(fuck you)의 이미지로 대신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약자의 속성은 여성성과 동일시되면서 가치절하되는 것이다.

이는 어떻게 여성과 남성을 이해하고 있는가, 남녀관계를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가를 함축한다. 따라서 이러한 표현들은 단순히 국제관계의 국가간의 정치성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군사적 성적 은유가 사용되고, 확산되면서 여성의 차별성과 남성의 폭력적 공격성에 관한 사고방식이 사실화, 내면화된다는 점에서 성(gender)의 정치성이 고려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전쟁의 폭력성은 단순히 전쟁시에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에서의 가부장적인 성 차별성, 남성의 성폭력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전쟁과 군사주의가 어떻게 여성의 성(sexuality)을 통제하는가하는 점은 여성에 대한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에서도 목격된다. 여성을 좋은 여성과 나쁜 여성으로 구분하여 취급하는 이원론적 성의 구조에서 남성들이 보호해야할 ‘우리’의 좋은 여자가 있다면, 강간을 해도 좋고 물건처럼 다루어도 되는 나쁜 여성 즉, 적의 여성이나 성매매에 있는 여성들이 있다.

지난 보스니아의 전쟁 때, 강간이 적의 종족 말살이라는 군사적 전략으로서 사용되어졌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충격을 주었다. 적이 보는 앞에서 적의 아내를 강간하고 다른 종족의 아기를 갖게 하는 고의적 강간은 동티모르 독립투쟁운동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특히 인도네시아 군부는 동티모르의 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매 6개월마다 동티모르 여성들에게 불임을 위한 강제 주사를 주입함으로써 여성의 성과 출산권을 통제한 바 있다 Almeida, 1997
. 남한과 북한을 비롯한 아시아, 네덜란드의 일본군위안부의 문제는 전쟁이 여성의 성을 통제하는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사례로서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3만 7천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남한에는 이들을 위한 매춘여성들이 기지촌의 주요 경제를 담당하며 상주하고 있다.


4. 성별화된 반공주의

남한과 북한의 통일을 염원할 때, 그 표현이 남녀의 사랑으로 많이 비유되곤 한다. 오랫동안 헤어져 만날 수 없었던 연인이 서로를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만나야 한다는 노래(직녀에게)나 철선 끊긴 기관차를 타고 그리운 님을 만나기를 간절히 읊는 시(녹슨 기관차 가득히 꽃을)가 그것이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흔히 북한은 여자로 남한은 남자로 동일시되면서, 남북통합은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해서 결혼준비를 잘 해야 하는 부부준비의 노력과정으로 비유된다 (전우택: 2001, 3-4).
사실상,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관계로 은유되는 통일이야기는 여성화된 북한과 남성화된 남한의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식민주의 담론에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관계를 설명하는 방식과도 동일한 맥락이다. 성별화된 은유적 관계를 한국-일본, 한국-미국의 식민주의-제국주의 구도에서 설명하고 있는 글은 Choi Chungmoo, "Nationalism and Construction of Gender in Korea," in Dangerous Women, Elaine H. Kim, Chungmoo Choi eds., NY: Routledge, 1998 가 있다. 한국 근대화 발전프로젝트에서 보여준 초남성화된 국가와 초여성화된 시민사회의 관계를 유교의 성별화된 유형론으로 분석한 글은 Han Jongwoo and Ling L.H.M., "Authoritarianism in the Hypermasculinized State: Hybridity, Patriarchy, and Capitalism in Korea," International Studies Quarterly (1998) 42. 참조.
서구사회는 남성적 문명의 중심인 주체(Self)로서, 비서구사회는 여성적이고 원시적인 타자(Other)로서 구성되면서 서구사회와 비서구사회의 관계는 성별화된 성적은유로서 설명된다. 남성화된 지배자인 주체(Self)와 여성화된 종속자 타자(Other) 사이의 정형화된 관계를 통일이야기 속에서 보여주는 사례가 영화<쉬리>이다. 영화<쉬리>는 오랜 역사동안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고 비인간화시켜왔던 반공주의를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기반으로 성별화시키고 있는 경우이다.


4-1. 여성화된(feminized) 북한과 남성화된(masculinized) 남한

먼저, <쉬리>가 표현하는 북한과 남한의 이미지를 살펴보자. 북한은 영화 첫 장면에서부터 암시하듯이, 원시적인 폭력성과 잔인함, 조국통일을 위한 개인희생, 고집불통같은 확고한 의지의 특징들로 표현된다. 남북한의 2002 월드컵 축구 경기가 열리는 올림픽 경기장에서 분단의 역사적 책임을 기존 정치가들에게 돌리며 남북한의 대통령들을 살해하고자 계획한 북조선 8군단의 대장인 ‘최민식’의 통일관은 아사 직전에 처한 대다수의 인민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출발하나, 상당히 위험하고 무모한 발상이라는 점을 남한의 OP요원인 ‘한석규’를 통해서 지적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의 ‘최민식’과 8군단 요원들은 다소 근시안적이고, 목적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융튱성 없는 인상을 준다. 북조선의 인물묘사는 8군단 단원들의 무표정함에서 극단화되는데, 이는 그들의 투철한 통일사업을 위한 의지의 표현이면서도 목적을 위해서는 인간도 도구화될 수 있다는 것을 다소 잔인하게 보여주고 있다.

반면, 남한의 OP요원인 ‘한석규’와 ‘송강호’는 합리적이고, 인간 중심적이며, 거시적인 안목, 치밀한 논리와 분석력을 갖춘 인물로 구사된다. 특히 두 집단의 대조적인 인물 특징의 표현은 그들이 등장하는 배경에서도 드러나는데, 남한의 OP 사무실은 어항을 인테리어로 장식할 만큼 여유있고, 인간적이고, 세련되었으며, 현대적이고 과학적인 첨단 장비들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북조선의 훈련장면은 현대적 무기장비 실행이 아닌, 원시적인 육체적 훈련에 더 주안점을 두고, 살육의 피 튀기는 장면과 함께 비인간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또한 북한의 군사력 현실은 그들의 작전수행을 위해서 남한의 CTX 액체포탄을 절도하여 이용할 만큼 열악하고 열등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적이고, 지적이고 문명화된 남한, 그리고 야만적이고, 육체적이고 원시적인 북한의 대조적 묘사는 여주인공의 이중적 여성상과 결합된다. <쉬리>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김윤진’은 두가지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북한의 비밀첩보요원인 ‘이방희’ 역의 강인하고 일의 목적성이 투철한 여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남한의 한 남자를 사랑하는 ‘이명현’역의 애교스럽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이방희’는 남자들도 견디기 고된 군사훈련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아 결국 북한 8군단의 비밀첩보요원으로 남한에 파견된다. 그 군사훈련은 참으로 잔인하고, 극도의 열악한 환경에서 악발이처럼 생존해야하는 실제훈련으로 연출된다. 이러한 훈련을 바탕으로 ‘이방희’는 단 총알 두발로 주요인사들을 암살하는데 성공하고, 이러한 그의 철저한 테러행위는 남한의 OP요원들에게 악명높은 공포가 되기도 한다. 그의 모습은 목적의식적이고, 철저한 사명의식과 한치의 실수도 없는 일 솜씨, 강인함, 냉정함, 대담함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이방희‘가 위장한 남한 여성, ’이명현’은 ‘한석규(애인 역) 없이는 한시도 못살 것 같은’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의 사랑에 대한 고상함은 ‘키싱구라미’라는 관상용 물고기의 특성에서 대신 표현된다. ‘키싱구라미’는 상대 짝이 죽으면 자학을 해서라도 따라 죽는 열녀같은 특성을 지닌 물고기이다. ‘이방희’는 애인의 빨래도 하고, 음식도 만들면서 애인과의 행복한 가정을 꿈꾸는 여인이다. 그는 헌신적이고, 밝고 명랑하며, 예민한 물고기들의 특성을 다 기억하고 돌보는 섬세한 성격으로 연출된다.
이러한 방법으로, 남한여성 ‘이명현’의 사랑스러운 여성 이미지는 세련되고 현대적인 남한사회와 조화를 이루는 반면, 북한여성 ‘이방희’의 강한 여성 이미지는 원시적 폭력성과 무모한 북한사회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표1> 성별화된 북한과 남한의 이미지
항목
여성화된(feminized) 북한
남성화된(masculinized) 남한
이미지
원시적, 폭력적, 야만적, 육체적
현대적, 과학적, 합리적, 문명화
여주인공의 여성상
일에 대한 투철한 목적의식, 강인함, 냉정함, 대담함
남자에 대한 헌신성, 귀여움, 섬세함, 사랑스러움, 명랑성



4-2. 남성화된 남한의 통일로

첩보원인 북한여성과 OP요원인 남한남성은 마치 통일의 미래상을 그리듯 서로 결혼을 약속하며 애정을 나눈다. 그런데 북한여성은 시간이 갈수록 이 사랑 앞에서 첩보요원인 ‘이방희’라는 여성과 위장된 ‘이명현’이라는 여성간의 갈등과 충돌에 직면한다. 이 갈등은 원시적이고 폭력적인 북한여성상을 고수하느냐 아니면 세련되고 섬세한 남한여성상을 선택하느냐 하는 함축적 의미를 내포한다. 이러한 갈등은 애인인 ‘한석규’와의 맞대결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서로 총을 겨누고 선 두 남녀의 대결의 긴장감은 결국 세련되고 섬세한 남한 여성상, 사랑 지상주의를 바탕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여성상의 선택으로 끝난다.
이는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원시적인 타자로서의 북한에 대한 승리이자 문명화된 남한으로의 흡수를 암시하고 있다. 영화는 북한 신세대 첩보요원의 과격한 통일관을 열정적으로 영상화함으로써 기존의 반공주의가 보여 준 적대감 보다는(권혁범, 2000) 반공주의의 표어의 내용과 비판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권혁범, “반공주의 회로판 읽기: 한국반공주의의 의미체계와 정치사회적 기능,”「민족주의와 발전의 환상」, 서울: 솔, 2000, 137- 174쪽; “내 몸 속의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 「우리 안의 파시즘」, 서울: 삼인, 2000, 49-63쪽. 참조.
좀 더 세련되게 재현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북한의 이미지는 여전히 야만스럽고 폭력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북한은 남한이 개발하고 구원해야할 타자일 뿐이다.
둘째, 북한여성의 목적의식적이고 강인한 여성상은 여성의 본래적 모습이 아니므로, 사랑스럽고 고운 남한 여성상으로 돌아가도록 종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지고 있는 남한여성상은 정상적인(normal)인 여성상으로 간주되고, 냉정하고 대담하게 과업을 성취하는 북한여성상은 비전형적인 여성상으로 가치절하되고 있다. 특히 북한의 전투적인 여성상은 폭력적인 북한의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본래의 여성의 모습이 아닌, 변종된 것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진짜 여성상’은 남한여성처럼 남자에게 헌신적인,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마지막 나레이션에서 여주인공의 정체성에 관하여 자문한다. 여주인공은 분단의 역사가 낳은 ‘이명현’이도 아니고 ‘이방희’도 아닌 ‘그냥 나’이고 싶음‘을 표명한다. 그러나 ‘그냥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따스하고 화사한 스웨터를 짜는 여인임을 암시한다. ‘그냥 나’로서의 여성이란 국가나 가족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적인 여성, 남성의 상대적인 성으로서의 여성이 아닌 자율적인 여성이어야 할텐데 (김은실, 2001: 46-47), 영화 <쉬리>는 ‘그냥 나’이기를 원하는 여성을 여전히 남자와 태아와의 관계에서 위치지우고 있다. 나아가 분단의 현실이 한 북한여성을 ‘진짜 여성됨’으로 만들지 못하고 머리가 9개 달린 히드라 여신으로 만들었다며 분단역사의 아픔을 고백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이 ‘그냥 나’로서 있지 못한 원인을 성차별적 가부장제 사회가 아닌, 특수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만으로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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