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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여성이야기
북한 여성,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3>

가정 속의 북한 여성

김귀옥|경남대 북한전문대학원 객원교수




북녁에는 전업주부가 있을까? 오로지 가사일만 하는 여성이 우리 남녁에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사회에 나가 돈 버는 노동을 하지 않고 가사 활동만 하는 기혼여성을 '전업주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북에는 이런 의미의 전업주부가 있을까?

북녘에서도 '가정주부'라는 말이 남녘과 같이 사용되지만 특이하게 '가두여성'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가두란 '한 집의 머리'라는 의미이니, 주부를 한 집의 우두머리로 가리키는 듯하다. 북녘의 가두여성과 남녘의 전업주부가 동일한 말일까에 대해 이제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북녘의 가두여성의 수에 대해 어림짐작이나마 계산을 해보자. 통계청 추계 북녘의 1999년 현재 인구는 2천2백8만 여명이다. 총 여성 인구는 1천1백2십5만8천 여명이고 그 가운데 미취업 여성은 대략 30%로서 3백3십7만7천 여명이다. 또 북녘 여성의 적령기를 25세 정도로 볼 때 25세 이상 여성의 가두여성은 약 50.5%라고 보면 1백7십만5천 여명 정도가 가두여성이라는 추론이 나온다. 대략 잡아 150만 여명이 가두여성으로 계산해두자.

그들은 대개 "가정과 사회, 국가를 알뜰하게 보살피는 주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한 그런 의미에서 "여성은 꽃이라" 노래로 대변되는 '꽃'으로 일컬어진다. 그들은 개인이나 집안의 조건에 따라 사회적 직업을 가질 수 없어서 집안일을 맡아보고 있다. 모든 사회의 혁명화를 주창하고 있는 북으로서는 가두여성이라고 하여 집안에만 있어서 사회 분위기에 낙후되지 않도록 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정의 혁명화' 정책을 제시하여 가두여성이라도 나라와 사회가 돌아가는 일이나 문제에 대해 알아서 사회주의 혁명의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심지어 정부는 부부가 함께 학습을 하며 가정을 혁명화시키도록 장려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대개 북녘의 기본 사회 단위인 "인민반"원으로 활동을 하거나 "조선민주녀성동맹"에 소속되어 활동을 하여 사회 활동과 연계가 된다.
북녘의 인민반은 북녘 사회의 기층 사회조직으로서 동사무소나 국가기관과 종적으로 연계되어 사회를 통제 및 감시하는 체계이다. 다른 면으로 보면 인민반은 최소 단위의 지역 사회를 일종의 공동체로 만드는 단위가 된다. 한 인민반에는 대개 같은 직장 사람들이 모여 살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은 바깥일이나 집안일에 대해서도 훤하게 알아 남녘에는 거의 해체되어버린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여전히 통하게 된다.
지역적 조건마다 해당 세대수가 다양하지만 평균 잡아 20∼40가구로 구성된다. 해당 반원들은 총회에 참석해 `반장', `세대주부반장', `선동원', `위생반장' 등을 선출하며 이들이 인민반을 이끈다. 원칙적으로 인민반은 해당 가구의 가족들이 모두 해당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대개 한 집에 가두여성이 있을 경우에 실질적으로는 가두여성이 인민반의 핵심 반원으로 활동하기 마련이다.
평소에도 동네 청소는 말할 것도 없고 눈이 잦은 북녘에는 눈이 온 다음날이면 지위 고하 막론하고 인민반별로 동원이 되어 집밖, 동네 인근까지 눈치우기에 나선다. 그 때 주동이 되는 것도 역시 대개 가두여성들이다. 심지어 맞벌이 부부인 옆 집 부부가 모두 출장하게 되면 같은 인민반 여성들이 그 집안의 아이들을 돌봐주거나 집안일을 챙겨주기도 한다. 또한 그들은 국가 행사 때면 의례 등장하는 집단행진이나 집단체조 등에도 동원되기도 한다. 북에서 집단행진, 집단체조 시에 일사불란한 동작이 나오게 되는 데에는 평소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호흡을 맞추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가두여성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여맹원으로서의 활동이다. 여맹원의 숫자는 정책이나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많았던 1970년대에는 여맹원의 수가 270만 명에 달하기도 했으나 88년의 기록에 따르면 20만 명이 가입하여 활동하고 있다. 2001년 금강산에서 벌어진 6·15 민족공동행사에 참여하여 만난 북녘 여성들과의 대화를 통해 확인한 바는 비당원이며 여타의 사회단체에 가입하지 않은 기혼의 여성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다.
정식 명칭으로 조선민주여성동맹(초대 위원장 박정애, 이하 여맹)은 1945년 11월 18일 창립되었다. 1950년대까지 여맹의 사업은 복잡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당시 가장 중요 사업은 여성의 문맹퇴치운동과 반봉건 운동, 건국 운동의 참여 등이었다. 50년대 전직 기생이 남아 있을 당시에는 한 기혼 남성이 그 여성과 간통을 하자 여맹원들이 그들을 마을 사람들 앞에 잡아다가 혼줄을 내어 남편은 다시는 외도하지 못하고 전직 기생에게는 농사를 짓도록 하여 매매춘을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는 거의 2001년 우리 사회에서 운동권내 성차별 문제를 제기한 바 있는 '여성100인위원회'를 연상시키게 한다.
또한 한국전쟁 직후 숱한 남성이 전쟁으로 사상을 겪자, 남녀 비가 현격히 기울어져 북에는 '트럭 대 일'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남성이 부족하였다. 그러한 현실에서 여맹은 여성의 사회참여를 호소하면서 숱한 노동 동원을 주도해 나갔다.
초기부터 여맹은 사상교양 사업과 노동력 지원 사업을 동시에 수행했다. 60년대부터는 전자에 보다 강조를 주었던 것 같다. 여맹원에 소속된 여성들은 '어머니학교'에서 강반석여사따라배우기 운동이나 김정숙여사따라배우기 운동을 하며 정치적으로 각성하며 가정만에 안주하지 않도록 한다. 90년대 북녘의 경제 위기로 나라 살림이 어려울 때 정치적 각성과 함께 살림 절약에서부터 생산 현장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여맹원들은 대단히 극성스러운 것으로 보이는데 지역 여맹원들은 대개 가까운 지역에 살게 되므로 심지어 한 집안일이나 부부싸움에도 개입하기도 한다. 한 부부가 싸워 냉전이 벌어지자, 지역여맹원들이 부부사이에 끼어 들어 시시비비를 따지며 부부를 화해시키기도 한다. 또 게으르거나 타락한 여성을 계몽하는 일에도 벌여나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정주부들은 가계를 보조하기 위한 부업을 많이 한다. 만일 한 여성이 평양시 동대원구역에 산다면 그 구역에 있는 의류공장에서 나오는 자투리 옷감을 공장에서 받아 같은 지역에 사는 인민반 여성들이나 여맹원들이 폐자재로 폐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판다. 그 시장은 대개 '농민시장'이나 장마당으로 불리는데, 남녁에는 이것이 암시장으로 불리고 있다. 그 시장 가격은 북녘의 국영 생필품 공급 상점인 '상업편의점'과 비교할 때 '수요-공급법칙'이 작용하여 편의점에 물자가 부족할 때면 몇 배 비싼 가격이 형성되기도 한다. 아무튼 장마당에 내다 판 돈을 다 모아 일부는 공장에 옷감으로 주고 나머지는 부업에 참여한 사람들이 생산한 개수에 따라 분배하게 된다. 1980년대부터 그런 일이 부쩍 많아졌다고 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민간인들 사이에 이러한 부업에서 주민들의 생필품이 많이 생산되고 실제로 가계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고 1984년부터 국가적인 사업으로 장려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8월3일인민소비품생산운동"이다. 그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바로 평양의 동대원구역의 가두여성들이었다. 그때 이후 대개의 공장에는 "8월3일인민소비품"작업반들이 형성되었다. 그 작업반 가운데 모범적인 작업반을 선정하여 "8월3일모범가내작업반"으로 부르며 그것이 되기 위한 경쟁도 벌어졌다. 한 예를 보자.

≪2중 8월3일모범가내작업반≫ 칭호를 받은 원산 평화동 가내작업반에서는 당의 경공업혁명방침을 높이 받들고 여러 가지 인민소비품 생산에서 혁신을 일으키고 있다. (…) 처음에는 20여명이 소규모적으로 운영하던 가내작업반이 오늘 150여명의 성원들로 꾸려졌으며 2개의 업종으로부터 9개의 업종으로 늘어났다. 평화동 가내작업반에서는 매달 500키로그람의 헌천과 300키로그람의 뜨개실 가위밥을 비롯한 노는 자재를 수집하여 70여종의 질좋은 제품을 생산하여 인민생활에 보탬을 주고 있다(『조선녀성』1992 제5호).

이러한 가두여성이 중심이 된 부업은 90년대 북녘의 식량 위기, 경제 위기 빈한한 살림을 근근히 나마 연명하도록 하는데 중요한 기여를 해오고 있다.
그 외 노래실력이 있는 어떤 가정부인은 틈틈이 시간을 내어 농촌을 다니며 위로공연을 하여 실의에 빠진 여성, 농민들을 북돋아주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또 지난 호에서 보았듯이 '군민일치 운동'에도 나서서 군인들을 도와주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을 놓고 볼 때 북의 전업주부는 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없다고 해야 할까? 정규직에 종사하지 않고 가사일을 전담하는 여성들이 있지만 그들조차도 대개는 부업을 하고 사회단체를 통해 정치 및 친목, 오락 등 각종의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실정이다.
남녘의 아줌마들과 북녘의 아줌마들이 함께 만나 여성의 행복한 삶, 더불어 행복한 삶을 꿈꾸며, 가부장제 권위를 부리는 남편들을 흉보고 자녀 자랑, 걱정을 나눌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런 날이 선뜻 다가오도록 통일을 준비해나가야겠다.

*평화를만드는여성회 소식지, <평화를 만드는 여성들>, 2001년 가을호 통권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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