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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문 및 성명서 Speeches & Statements

동북아시아의 평화구축과 일본의 입장, 그리고 여성의 역할  

 

시미즈 스미코(?水澄子)            

전 참의원 의원"E여성회의상임고문 조선여성과 연대하는 일본부인연락회 대표

 평화포럼 부대표

북일국교정상화연락회 공동대표

 

서론

현재 한반도의 비핵화와 동북아시아의 영속적인 평화 및 안정을 구축하기 위한 6자회의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확실히 한반도에서의 냉전과 분단 시대의 종결을 향한 첫 걸음을 내디디려 하고 있다. 이러한 큰 변화의 시기에 국가간의 협의뿐 아니라 6개국의 여성이 어떻게 동북아시아의 평화구축에 기여하고 연대와 운동을 추진해 갈 수 있을까. 새로운 평화창조를 위한 협의의 장을 마련해 초청해 주신 한국의 정현백 위원장님 그리고 추진위원회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감사 드린다.

 

또한 일본은 6자회의 멤버국가 이나 역사적으로 되돌아 봤을 때 북한과 한국에 게 식민지지배라는 희생을 겪게 한 나라이며 특히 중국에 대해서는 침략전쟁의 책임이 있고 미국, 소련과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던 상대국이었던 점 등 다른 5개국과는 입장이 다르다. 하지만 미국 등과 같은 연합국과는 1951년에 강화조약을 체결하였고(소련과는 미체결)한국과는 1965년에 한일 기본 조약을 맺었으며 중국과는1972년에 국교를 회복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하지만 조선민주주의공화국과는 여전히 식민지지배의 청산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국교를 맺지 않은 유일한 나라라고 하는 비정상적인 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북일관계의 정상화가 반드시 필요하며 일본의 우리들로서는 절박한 과제이다. 또한 이러한 북일관계의 배경에는 미소냉전 하에서의 미국의 전략이 막대한 영향을 끼쳐온 사실이 있다는 점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한반도 문제는 동북아시아 전체의 문제임과 동시에 세계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일본 시민으로서 그리고 여성운동이라는 시점에서 북일관계의 극복에 대해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발전을 기원하며 보고한다.

 

1. 일본과 한반도와의 역사적 관계

 

1) 일본의 식민지 지배

 

(1) 일본은 유사이래 한반도로부터 다양한 문화적 혜택을 받아왔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 침략과 점령을 되풀이 하였고 1910년에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합병해 식민지지배는 36년에 달했다. 그 간의 식민지정책은 토지, 문자, 언어, 이름을 강탈하고 종교, 문화의 모든 민족성을 말살하였으며 일본의 천황제 국가와 군국주의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일본국내에서는 철저한 조선인 멸시사상과 차별정책을 전개하고 일본인 우월사상을 선동하였으며 인간 사이의 감정과 연대를 분열시켰다. 그 결과, 한국내 반일독립운동을 탄압하였고 1923년에 간토대지진이 발생했을 때에는 경찰당국이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는 유언비어를 유포해 계엄령하에서 7,000여명에 달하는 조선인 학살사건을 야기시켰다. 하지만, 그에 대한 사죄와 반성은 하지 않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불문에 부쳐진 채로 남아있다. 또한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 국내의 노동력확보 방안으로 국가 명령하에서 조선인을 대량으로 강제 동원하고 탄광 및 광산, 댐, 철도건설 등에서 가혹한 노예노동을 강요해 많은 희생자를 냈다. 하지만 그 유골에 관한 조사 및 반환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군 병사로 징병된 사람들조차 그들의 유족에 대한 생사 확인 및 유골 반환사업도 완료되지 않았다. 덧붙여 천황제가부장주의의 지배하에서 조선민족의 존엄과 인간의 존엄을 파괴적으로 강탈당한 희생자가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이다.

 

2)남북분단과 반성 없는 일본

 

(1)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1945년의 침략전쟁에서 패배하고 식민지지배가 끝났을 때 한반도인들에 대한 사죄와 반성과 보상의 청산을 하지 않아 왔다. 게다가 일본의 식민지지배가 끝난 후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1948년에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이 탄생했다. 1950년에는 6.25전쟁이 발발해 일본은 전쟁포기라는 헌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정책에 의해 미군의 병참기지로서 군사행동에 가담했다. 이후 일본은 북한과 적대와 긴장의 관계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한국의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을 지지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 민중의 탄압에 협력했다. 한일 기본 조약의 체결은 일본 내 재일한국인과 조선인을 갈라놓았다. 1973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김대중 씨(전 한국대통령) 납치사건에 대해서도 일본정부는 김대중 씨의 인권회복 및 일본의 주권회복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정치적 결착으로 진상을 어둠 속에 묻어두고 있다.     

 

(2) 또한 6.25전쟁을 계기로 일본의 보수세력은 헌법을 개악하고 군사국가로의 회귀를 책동하였으며 대다수 일본국민의 의사에 반하는 야망의 실현을 고집하고 있다. 과거 그들의 군사화와 헌법개악의 구실은 소련과 중국위협론이었다. 최근에는 북한과 중국위협론을 구실로 내세우고 있다. 일본과 한반도는 이러한 관계에 놓이게 되었고 일본사회에는 뿌리깊은 식민지주의가 온존해 있다. 식민지정책을 미화하는 정치가의 발언이 계속되고 있으며 ‘위안부’문제 및 남경학살사건을 역사교과서에서 삭제하거나 다케시마(한국명: 독도)의 영유권문제 등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왜곡하는 행위가 되풀이 되고 있다. 최근(08.6.28) 시모노세키(下?)시의 교육장은 ‘식민지지배는 없었다’라는 폭언을 해 시민들의 신랄한 규탄을 받았다. 하지만 한반도에 대한 일본사회의 희박한 역사인식은 정부당국 및 의회에 그치지 않고 시민운동과 평화운동에 있어서도 공통된 부분이 존재하며 일본의 식민지주의는 극복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재일한국인 및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뿌리깊으며 시민적 권리의 확립과는 거리가 먼 상황에 있다.

 

2.식민지주의의 극복을 향해

 

1) 우리들이 조선여성과 연대하는 일본부인연락회 (조선은 남북모두 포함)을 결성한 것은 1973년의 일이다. 결성동기는 일본의 평화운동에 식민지지배에 대한 반성이 없고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인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성과 동시에 김대중 씨 납치사건이 일어나 최초의 활동이 ‘김대중 씨를 죽이지 말라’는 김대중 씨 구출과 원상회복을 위한 운동이었고 이후 30년간 이 활동이 이어져왔다. 그간 한국 내 정치범 석방 및 노동자의 권리투쟁을 지원하고 기생관광에 반대하는 데모 등을 거듭 실시해 왔다. 또한 북한 여성과의 교류활동을 비롯해 한반도의 자주적인 평화 통일을 지지하는 국제여성회의를 개최하는 등 해외 여성단체에 한반도의 현 상황을 알리고 자국정부에 한반도의 분단을 종식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 마련을 요구해 왔다.

 

2) 그 중에서도 감동적인 활동은 1991년에 일본에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 심포지엄’을 개최해 한국의 이우정씨, 이효재)씨, 윤정옥씨와 북한의 여연구(呂燕九)씨가 분단 후 43년째 되던 해에 일본에서 재회한 일이다. 심포지엄에서는 3개국 여성의 공동과제로서 ①일본정부에 ‘위안부’ 문제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②북일관계의 정상화와 남북통일을 위해 협력하며 ③재일한국인 및 조선인의 인권보장 확립을 서로 확인했다. 이 심포지엄은 같은 해 가을에 서울시에서 개최되었고 다음 해에는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남북의 여성은 분단 이후 처음으로 38선 군사경계선을 왕래했다. 한국국가정보원 및 남북한 정부를 움직이게 한 여성의 힘과 운동은 남북통일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향해 첫 걸음을 내디딘 실천이라 할 수 있다.

 

3) 이러한 연대가 그 후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공통된 노력으로 이어져 일본과 한국 및 북한의 여성들과 맺은 강한 연대는 아시아 지역 피해자들의 단결을 호소하고 일본정부에 대한 항의와 사죄요구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UN에서의 성폭력 철폐선언으로 이어졌다. 20세기말 아시아 페미니즘 운동의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여전히 진정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북한의 피해자에 대한 보상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우리들은 일본정부에 대해 더 이상 북일 관계 정상화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각지에서 집회 및 요청활동을 벌이고 있다. 또한 역사청산의 원폭피해자 및 위안부로 끌려가셨던 분들, 강제동원 피해자의 유골 반환 등 개인차원의 보상문제에 대해서는 국교수립 이전에 앞당겨 실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피해자들은 모두 고령이므로 보상 조치의 지연은 피해자의 인권을 의도적으로 유린하는 것이며 과거의 범죄를 되풀이해 저지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들은 북일 관계 정상화가 하루 늦어질 때마다 일본인의 역사인식이 약화되고 인권침해에 둔감해지며 인간성이 희박해 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는 아시아인들과의 새로운 동반자관계 구축과 동북아시아의 평화 구축을 위한 주체형성에 암운을 드리우고 전세계 국민들의 평화적 생존권의 확립을 주창하는 일본국 헌법 이념의 공동화를 가속화하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3. 북일국교정상화의 필요성

 

1) 우리 일본인에게 있어 북일국교정상화의 과제는 (1) 36년간의 ‘식민지지배를 청산하는 것’이며 (2) 2차 대전 후의 일본과 북한의 비정상적인 적대관계를 우호적 평화적인 관계로 정상화 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의 실현은 분명 남북문제의 화해와 통일에 크게 기여하고 무엇보다도 일본사회의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의 전진으로 이어지며 타민족과의 공생사회와 평화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2) 정상화를 향한 노력과 미국의 개입

북일국교정상화를 위한 활동은 1955년에 북한측의 제언으로 처음 시작되었으며 1990년대에 걸쳐 몇 차례 협상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한국의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미일 안보기축론에 얽매여 북한과 국교를 맺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1972년에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북일간의 인적교류가 활발해지고 정상화를 향한 움직임이 진전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북일관계가 남북관계보다 앞서 나가는 데에 제동을 걸어왔다. 1980년대 한국의 민주화가 이룩되고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가 시작되었으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1990년에는 다시 북일국교정상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문제를 거론하도록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에 협상은 중단되었고 공전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4.북일평양선언과 ‘납치’문제, 헌법개악에 역용   

 

1) 이러한 상황에서 2002년 9월에 고이즈미(小泉)총리가 방북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북일 평양선언을 조인하고 정상화 실현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일본 총리는 식민지지배가 가져온 손해와 고통에 대해 반성과 사죄의 뜻을 표명했으며 북한 지도자는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일본은 정상화 후의 경제협력을 약속했고 북한은 핵 문제에 대해 기존의 국제적인 규정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획기적인 진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2) 하지만 일본 국내 언론과 국민감정은 납치문제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의회 및 정부 내 강경파들은 북한의 체제붕괴를 목적으로 한 압력정책을 요구하며 식료품, 인도지원을 중단하였고 일본사회는 반북 운동 체제로 회귀했다. 미국에서는 클린턴 정권의 뒤를 이어 출범한 부시 정권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미국의 단독주의적인 핵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고 발표했다. 그 결과 한반도는 군사적 긴장상태에 빠지게 되었으며 2006년에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 및 핵실험을 실시했다.

 

3) 일본의 아베(安倍)정권은 즉시 북한 선박의 일본입항과 북한 물자의 수입을 금지하였고 북한관리의 입국금지 등 경제제재에 나섰다. 그리고 재일조선인과 조선인단체를 혹독하게 정치적으로 탄압했다. 아베(安倍)정권은 일본의 대북협상에서 ‘납치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었고 북일간의 인적 및 물적 교류가 단절됨에 따라 북일관계는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적대관계가 되었다. 이러한 대북 압력정책과 함께 헌법 9조의 개악절차로 나아가는 법안이 국회 정치일정에 반영되어 군사력 확대와 미군기지 재편이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동시에 실시된 것이 Gender Bashing이다.

 

5.‘남북관계의 극복’과 ‘북일관계의 극복’ 및 6자회의에 거는 기대

 

1) 남북공동선언과 북일평양선언의 의의

 

(1) 하지만 북일 평양 선언의 역사적인 의의는 조금도 손상되지 않았다. 또한,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처음으로 북일간의 정상화 프로세스가 이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기 위해 다자간 협력관계의 신뢰조성을 도모하는 포괄적인 협의체와 이 협의를 통해 해결될 것임을 명백히 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2) 이러한 성과의 배경에는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한 ‘햇볕정책’ 즉 북한과의 적극적인 화해정책과 2000년 6월에 개최된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경제, 정치, 문화, 사회, 교통 분야 및 이산가족 재회 등 남북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그 흐름에 대해 ‘잃어버린 10년’ 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공동선언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6.25전쟁의 종결과 평화체제 구축을 향해 관계 각국과 남북이 공동으로 협력한다는 합의이다. ‘남북관계의 극복’과 ‘북일관계의 극복’은 밀접한 관계에 있다.

 

2) 북미관계의 정책전환― 군사적 제재에서 평화적 방법으로

 

(1) 북한을 제2의 이라크라 규정한 미국 네오콘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부시 미국 대통령은 6자회의 내에서 북미관계를 대결에서 대화로, 제재에서 외교적 방법으로 정책을180도 전환했다. 그리고 6.25전쟁의 종결과 북미 국교정상화를 최종적인 협상조건으로 삼고 북한의 ‘비핵화’를 단계적으로 평화적, 비군사적인 수단을 통해 해결해 나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북한은 2007년 2월13일에 열린 제 5회 6자회의의 합의와 같은 해 10월3일의 합의를 바탕으로 핵개발계획에 관한 신고서를 제출했다. 이를 인정한 미국 정부는 북한을 테러지원국 지정에서 해제하고 6.25전쟁 이후 58년간 이어져 온 적국 통상법 적용 대상국에서 제외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7일에 북한은 영변에 있는 핵 시설의 냉각탑을 폭파했다. 상황은 급속히 변화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국가가 6자회의의 진전을 바라며 일본이 납치문제에만 집착하지 않고 북일 협상을 궤도에 돌려놓기를 염원하고 있다.

 

(2) 현재 6자회의는 핵 검증과 폐기라는 가장 중요하고 힘든 작업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우리들은 지금이야말로 진지하게 북일 국교수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개척하고 6자회의의 진전에 기여해야 할 때라고 일본정부에 요구하는 전국적인 국민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우선 제재를 해제하고 협상을 통해 ‘납치문제’의 해결과 국교회복을 이루기 위한 구체적인 프로세스를 제기해 협의에 들어가야 한다. 동시에 6자회의에서 합의한 대북 에너지 지원 및 인도적 지원을 실시하고 다른 5개국과의 공동책임을 져야만 한다.   이제 북일 정상화는 북일 양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남북대화와 북미 협의, 나아가 중국, 러시아의 ‘평화적’ 개입 등 다자간 관계의 중층적인 전개와 깊이 연관되어 마지막 냉전지대에서 탈피하고 새로운 동북아시아의 안전보장지역 형성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6.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구축하는 여성의 네트워크로!  

 

(1) 이와 같이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의 핵심은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의 실현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한반도의 비핵화이며 남북한의 통일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6자회의에서 지금까지 한반도에 군사적 혹은 평화적인 개입을 해 온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주변 4대 강국이 당사국과 같은 협상 테이블에 앉아 현상황의 타개와 미래에 대해 구체적으로 협의하고 있다는 것은 역사적이며 획기적인 사건이다. 따라서 여성들도 이 6자회의 프로세스와 중요한 합의사항 및 각각의 양국간 약속사항 등에 관심을 가지고 상황을 공유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2) 이에 입각하여 국제정치 및 안전보장 분야는 실제 정치적 지위에 관계없이 남성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구조에 대해 여성은 어떠한 관점에서 평화구축에 임하면 좋을 것인가. 당면 과제를 두, 세 가지 논해보고자 한다. 21세기의 평화 창조에는 국가중심주의 및 남성중심주의를 극복하고 주민의 참가와 일반 시민들의 관점을 얼마나 중시하며 성차별 해소를 목표로 하고 있는가가 요구된다. 그런데 이러한 평화구축을 추진하는 주체는 시민과 여성들이며 국가를 초월한 연대와 운동의 힘이 필요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동북아시아의 평화창조를 위해서는 국가간의 논의뿐 아니라 이 지역에서 생활하는 시민과 여성의 적극적인 참가가 요구된다.

 

(3) 이번에 서울에 모인 우리들은 그 첫걸음으로서 정보 교환 및 공동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공동 선언 등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있다. 평온한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향한 ‘여성 네트워크’ 구축을 제창하고자 한다. 그리고 평화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는 힘과 인간으로서의 공감, 인간으로서의 연대를 만들어내는 운동임과 동시에 여성으로서의 공감과 연대를 기초로 한 새로운 평화운동을 만들어 냈으면 한다.

 

(4) 이와 함께 지금 무엇보다도 동북아시아의 대립과 군사적 긴장을 해소하고 비핵평화지역을 만들어내기 위해 서로가 놓여있는 상황에서 가능한 것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예를 들어 일본과 한국처럼 미군중심의 안전보장하에서는 미군기지에 배치된 미군병사의 범죄와 현지여성 및 소녀에 대한 성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어 기지철거는 주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사태가 되풀이 되고 있는 가운데 여성들은 세계화되고 있는 군사화와 성역할의 관계에 눈 뜨게 되어 군사적 성폭력의 본질과 구조를 의식한 운동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성역할 이라는 관점에 뒷받침 되고 있는 여성운동은 기존의 반전평화운동이 보이는 방향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기존의 반국가 반군사로 일관하던 운동에 변화를 주고 있다. 나아가 최근 깨닫게 된 것은 일본의 보수주의자와 강경파는 한반도의 분단과 대립을 자국 군사화의 구실로 이용해 비군사국가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을 군사국가로 바꿀 시기를 엿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동향과 연동하여 여성의 성별 역할론이 정치지도부에서 거론되고 있어 여성 인권에 관한 법제도의 개선을 어렵게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북한문제의 해결과 반군사화는 일맥상통 하며 성역할의 부정과 일체 되어 있다는 인식하에 군사화가 성별역할을 필요로 하는 구조라는 데 대한 비판을 강화하고 있다. 그리고 군사중심의 안전보장에서 탈피해 인간의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5) 마지막으로 일본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나라이므로 핵무기폐기는 국민의 염원이다. 그래서 한반도의 비핵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비핵3원칙의 법제화 등을 요구하며 활동하고 있다. 또한 일본국헌법9조는 ‘국권의 움직임으로 시작된 전쟁과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는,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영구히 이것을 포기한다.’ 라고 선언하였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육해공군 그 외의 군사력은 이를 보유하지 않으며 국가의 교전권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라고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평화세력은 이 헌법9조가 개악되는 일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며 ‘9조 모임(九??)’ 및 다양한 운동을 민간차원에서 확대하고 있다. 이 헌법은 과거의 과오를 교훈으로 한 인류의 뛰어난 지혜이며 모든 국가의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권리를 갖는다고 명기한 훌륭한 헌법이다. 우리들은 이 헌법을 세계의 공통된 헌법으로 삼자는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데 동북아시아의 평화시스템 구축에도 이 평화헌법의 이념을 살려 나갈 수 있도록 여러분과 함께 협력할 것을 맹세하며 보고를 마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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