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2.30 14:51
- 아래 내용은 국민일보 창간 21주년 기념으로 연재되었던 회복적사법시리즈 가운데 갈등해결센터 관련 기사입니다. -
[국민일보 창간 21주년-“우리 아이를 용서해주세요” 가해·피해자 갈등 해결 ‘회복적 사법’]
용서가 한 아이의 미래를 바꾼다
[2009.12.09 21:39]
제 이름은 김미란, 나이는 마흔여섯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은행원이던 남편은 일자리를 잃었고, 수억원의 빚을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낮에는 백화점 점원, 밤엔 공사장 청소부로 일했습니다. 악착같이 살다보니 내 자식만 유달리 더 귀해 보였습니다.
2007년 12월 6일, 중학교 2학년인 제 아이가 급식 시간에 반 친구와 싸우다 다쳤다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집에 가서 보니 치아가 한 개 부러지고, 아이는 계속 구토만 했습니다. 다음날 학교에 찾아갔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제 아이와 가해 학생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었습니다. “몇 대 맞았어?” “10대 맞았습니다.” “몇 대 때렸지?” “1대 때렸습니다.” “그럼 2∼3대 때린 걸로 하자.” 해결 방법은 참 간단했습니다.
제 아이는 10여일 입원했습니다. 가해자 아버지는 금니를 해줄 수 없으니 차라리 고소를 하라고 버텼습니다. 학교, 교육청, 가해자 부모에게 전화하고 찾아가기를 여러 차례. 결국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시켰고 서울가정법원까지 갔습니다. 피해보상 정도 받아야겠다던 생각이 점점 알 수 없는 독기로 변했습니다.
“엄마, 날 때리기는 했지만 정엽(가명)이가 그렇게까지 나쁜 애는 아니야.” 제 아이가 오히려 가해 학생을 두둔했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법대로 하자.” 가해 학생은 두 번의 재판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7월 17일, 평화여성회 갈등해결센터 상담사가 만나자고 전화했습니다. 같은 달 27일 오후 7시, 약속 장소로 나갔습니다. 밤 12시가 될 때까지 억울한 사연을 말하고 또 말했습니다. 눈물 콧물이 범벅된 제 얼굴을 보면서도 상담사 세 분은 시계조차 보지 않았습니다.
‘뭐 하는 사람들이기에 돈도 안 되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는 걸까.’ 5시간의 ‘열변’을 토하고 나니 궁금했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대화를 통해 갈등을 해결하는 ‘회복적 사법’을 위한 단체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그 후 세 번 더 만났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억울함을 누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증오와 분노가 조금씩 풀렸습니다. 가해자 가족을 만나기로 결정했습니다.
같은 해 8월 12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어학원. 가해 학생인 정엽이가 문을 열고 쭈뼛거리며 들어왔습니다. ‘저 애한테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법대로 처리한다는 명분 아래 8개월간 변호사를 고용하고 경찰서와 학교를 쫓아다녔던 저는 그 애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습니다. 용기를 내 입을 열었습니다. “정엽아, 너한테는 정말 미안해.”
정엽이는 얼굴을 숙인 채 “죄송합니다”라는 말만 반복했습니다. 정엽이 아버지의 입술 끝이 살짝 흔들렸습니다. “그렇게까지 하는 건 아닌데. 제가 잘못한 겁니다. 미안합니다.”
‘미안하다’는 말, 그 한 마디를 듣기까지 꼬박 8개월이 걸렸습니다. ‘용서’의 물꼬가 터지자 아이들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습니다. 이후 가해자 부모로부터 병원비 400여만원을 받았습니다. 지난해 12월에는 정엽이 아버지에게 안부 전화를 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가해자와 화해하지 않았다면 제 자식은 평생 ‘용서’를 배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위로받을 수도 없었을 겁니다. 서로 화해하고 상처를 회복할 수 있는 법.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사람답게 사는 법이 정착됐으면 좋겠습니다. ‘회복적 사법’ 말입니다.
◇Key Word 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범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 회복을 통해 재범 방지 및 피해 회복을 추구한다. 처벌 위주인 기존 사법 체계의 대안으로 주목 받고 있다. 1990년대부터 북미와 유럽, 뉴질랜드 등에서 소년범 대상 사법 제도 개혁의 근간이 됐다. 조정, 회합, 배상 모델의 세 가지로 크게 구분된다. 우리나라는 2007년 경찰, 지난해 법원 단계에서 회합 모델을 시범 운영했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