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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여성회 : 여성평화뉴스레터


남쪽에서만 살아온 60여년, 나에게 ‘통일’은 무엇인가?

윤수경(평화여성회 공동대표)


‘남북통일’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지금 내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남북 이산가족이 아니라면, 도대체 통일이 되건 안 되건 무엇이 그리 문제되는가? 아니 이산가족이라 하더라도 부모,형제와 헤어진 연령층은 이젠 어느 정도 포기 또는 체념했거나, 젊은 층이라면 오히려 번거롭고 귀찮은 과제가 된 건 아닐까? ‘당위’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솔직한 우리 현실을 얘기하자면 그렇다. 남 앞에서 대놓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못살고 골치 아픈 북쪽을 생각하면 답답해서 피하고 싶다. 한반도 남쪽에서 해방 후에 태어나 그럭저럭 살아온 나에게도 ‘통일’은 남의 일 비슷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시키는 대로 살면 별로 저촉될 일이 없었다. 그런 내가 통일운동 언저리를 맴돌게 된 계기가 있었다.

1. 해방 다음 해에 태어났으니,5살 때 6.25피난을 고개 너머로 갔고, 비행기가 떴다 하면 방공호로 뛰어가서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떨어야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던 해에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라고 불렀다)에 입학했는데, 월사금(그때는 수업료를 냈다)을 못내어 결석한 짝꿍의 집을 찾아갔더니 하수구 위에 지은 지은 천막이었다. 해마다 3월 26일이면 충청도 읍소재지의 국민학교 전교생은 위대한 분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를 불렀다. “위대하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모내기가 끝날 때쯤 6.25날이 다가오면, 읍내에서는 6.25기념 반공 웅변대회와 반공 글짓기 대회가 열렸다. 대표로 뽑혀서 나가곤 했는데, 큰 상은 못받았다. 또 6.25 당일에는 전교생이 조회시간에 노래를 불렀다. “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조국의 원수들이 짓밟아오던 날을...이제야 갚으리 그 날의 원수를...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내 나라 내 겨레” 2. 여중학교 2학년 때 5.16 쿠데타가 났다. 즉시 전교생에게 ‘혁명공약’을 외라는 지시가 내렸는데,나는 제일 먼저 정확하게 왼다고 조회시간 단 위에 올라가는 영광을 입었다. “ 일,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이제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그리고 학교에 학도호국단이 생겨서 분대장,중대장 같은 군대식 학생조직이 만들어지고 행사 때면 깃발을 앞세우고 거수경례를 붙이면서 사열식을 했다. 나중에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씀에 의하면, 6.25때 큰 고모의 아들이 좌익으로 몰려 총살을 당했고, 여맹위원장을 지낸 작은 고모는 인민군과 함께 후퇴하던 중 천안 어디쯤에서 잡혀 총살당했다고 한다. 큰아버지는 좌익이라고, 아버지는 우익이라고 옥살이를 하셨고, 경기중학 다니던 사촌오빠는 월북하여 아직도 생사를 모른다. 큰어머니는 돌아가실 때도 아들 이름을 부르셨다.

3.이런 집안 내력과 시대적 배경을 갖고 자란 양조장집 둘째 딸에게 ‘통일’은 별 관심거리가 되지 못했다.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다 겪었을 예삿일이었다. 배운 대로 ‘반공’만 한다면 무슨 일이 생길 리도 없었다. 사건은 뒤늦게 터졌다. 동아일보 기자였던 남편이 ‘언론자유’를 주장하며 박정희 유신체제를 반대하다가 투옥되자 다니던 출판사에서 쫓겨나게 된 나에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줄여서 KNNC 라고 부른다) 인권위원회에서 일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KNCC 인권위원회는 살벌한 유신체제에 저항하여 ‘반유신 반독재’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곳이었는데, 남편이 거기서 잠시 일하다 투옥된 인연과 우리집의 막막한 생계를 염려해준 배려였다.

4. 그때가 1979년 2월이었다. 남편이 동아일보에서 해고된 후 두 번째 구속까지 5년여 동안 미행,감시, 연행,가택연금 등 수많은 일을 당했지만 내 의식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나라도 직장을 다녀 살림을 꾸려가야 한다는 압박감과,그런대로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탓에 ‘투쟁‘이니 ’반대‘니 하는 단어조차 거칠게 느껴질만큼 얌전한 편이어서,그저 남편 하는 일에 소극적으로 동조하는 정도였다. KNCC 인권위원회로 옮긴 것도 교도소 남편 면회와 재판정에 자유롭게 갈 수 있다는 것이 큰 이유였다(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내 업무였다). 인권위원회에서의 6년과, 민주화운동 자료를 모아 책을 만드는 3년 사이에 나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았다.

5.유신체제 말기와 신군부의 등장-전두환정권-으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문,투옥되고 죽임을 당했다. “독재타도” “양심수를 석방하라”는 프랭카드를 내걸고 두세번 소리치자마자 주변에 깔려 있던 기관원-경찰서,중앙정보부,치안본부,시경,기무사 등에서 나온 사람들을 우리는 이렇게 불렀다-들이 달려들어 끌고갔다. 그렇게 구속되면 형량이 징역 2~3년이었다. 겨우 두세번 반정부 구호를 외쳤다고 징역 2~3년이라니! 학생들은 그래도 나았다.노동자들이나 일반인들에게는 걸핏하면 반공법,국가보안법의 굴레를 씌웠다.이렇게 되면 사상범-빨갱이-이 되어 감방에서의 처우는 물론 형량도 훨씬 많았다. 심지어 긴급조치로 구속된 학생들의 가족마저도 반공법 구속자 가족들과는 거리를 두려 했다.사상범 딱지가 붙기만 하면 밖에 있는 가족마저 기피인물이 되었다. ‘불온문서,불온서적’이란 단어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것은 곧 고문과 투옥을 의미했다. 정부를 반대하는 것은 북한에 동조하는 것이며. 곧 북한을 이롭게 한다는 획일적 논리가 흉흉한 소리를 내며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6.수없이 구속되는 양심수들과 그 가족들의 눈물, 석방기도회와 단식농성-이런 것들을 보고 겪으면서 비로소 분단현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냉전체제의 가장 큰 희생자는 바로 한반도였다. 국토가 나뉘고 부모형제가 갈라지고 서로 총부리를 겨누면서 증오에 찬 교육을 받았다. 상대의 것은 무조건 ‘악’이라고 가르치면서 어떤 질문도 의문도 거부되었다. 아예 처음부터 금지되어서 나처럼 의식조차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거기서는 정신을 차리고 사방을 둘러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곧 ‘의식화’이고, 의식화 =반정부=용공이었다.. 나는 비로소 내가 반쪽 교육을 받아왔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교육이 반쪽이니 보는 것도, 듣는 것도, 생각도 다 반쪽 불구였다. 한쪽이 마비되면 다른 쪽도 상하게 마련이다.그것이 유기체의 특징이다. 서서히 ‘분단’이야말로 우리 민족,우리 나라, 우리 삶의 원죄임을 알기 시작했다. 분단은 깔려 있는 지뢰였고,사방에 입벌린 함정이었다. 이걸 피하려면 먹여주는 것만 먹고,시키는 것만 하고,끌고 가는 대로 끌려가야 한다. “그럴 수는 없다,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깨닫는 순간 고문과 투옥을 각오해야 한다.

7. 함석헌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군부독재 18년의‘독’을 씻어내려면 2백년이 걸릴지 모른다”고. 분단 60년 동안 우리가 배우고 가르친 것은 증오와 분노와 비난과 불신, 대립과 갈등이었다. 그것들은 경직과 편협과 배타와 친구가 되어 상대를 짓밟고 넘어뜨린다. 거기서는 상대에 대한 어떠한 인정(認定)이나 배려는커녕 타협과 대화도 거부된다. 우리가 ‘통일’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갈라진 국토,부모형제,주권...그런 것만은 아니다. 이 증오와 대결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우리의 몸부림이다. 하나의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한 우리의 피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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