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계적 이슈는 미국 발 금융위기와 멜라민파동으로 야기된 중국산 식품의 위험성 공포다. 특히 그 두 개 이슈 모두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국가 그룹에 속하는 한국 정부는 다른 나라들과는 매우 다른 행동을 보여 의아심을 자아냈다.
금융위기는 정부가 앞장서서 심리적 위기감이 더 문제라고 안심시키기에 급급하다. 위험성이 내포된 중국산 식품을 우선 수입중단 시키고 검사해 나가기보다 그냥 시중에서 유통되도록 방치한 채 몇 품목씩 차례로 검사해 나가 온 국민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런 한편에선 대통령의 개인교수를 자임하는 한 신문에 한국 출신의 한 미국 상원의원이 미국 쇠고기에 촛불집회로 요란하던 그 세력은 다 어디 갔느냐고 호통을 친다. 왜 중국산 수입에는 조용하냐며 그 신문 특유의 색깔론에 편승한 글이 큼지막하게 실린다.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가 없다.
위험한 중국산 식품 소동에는 전 국민이 불안해한다. 하지만 채소류까지 줄줄이 중국산이 뒤덮고 있는 식품 유통구조 속에서 굶고 살 수 없는 서민들 대부분은 걱정만 할 뿐 크게 대처할 방법이 별로 없다.
한 방송에서 한 가족이 하루 동안만 중국산 안 먹기를 시도하는 내용의 프로그램을 보여줬다. 평소 안전한 식품을 꽤 신경 쓰는 주부라는 데도 그가 골라 사온 식품의 절반은 많든 적든 중국산 원료를 사용했다. 아마도 재배시 사용한 비료나 가축 사료까지 다 조사하면 중국산의 영향을 전혀 안 받은 식품을 골라낸다는 것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일지도 모른다.
지금 안전한 먹을거리를 찾아 헤맬 수 있는 이들은 어떻든 ‘살만한’ 사람들이다. 진즉부터 한우고기 믿고 살 곳을 찾아 산지를 찾아 헤매온 중산층들의 뒤태는 종종 봐왔다. 요즘은 야채 구매하러 농장 나들이까지 나선다는 소식마저 들린다.
그런데 내 밥상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동안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먹을거리조차 구하지 못하는 이들이 우리와 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생각을 단 한순간이라도 하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싶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식량위기를 겪은 북한 어린이들의 체격은 12,13세만 되면 남한 어린이들보다 몇 년씩의 격차를 보일 정도라는 데 그걸 외면하고 내 밥상의 평화와 안전만 지키는 일이 가능한 일일까.
10수년전 한 탈북여성이 북한의 인권을 말하는 이들에게 굶어 죽어가는 이의 인권은 따뜻한 밥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던 게 내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요즘 북한 인권을 말하는 국내 인사들 중에는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을 퍼주기라고 입에 게거품 무는 이들이 많다.
굶어 죽어가는 인류가 아직 세계 도처에 널려 있고 당장 우리와 한 핏줄인 북한의 기아 상태가 세계 2위라는 슬픈 소식을 듣고 사는 이즈음이다. 배고픈 이들의 밥상을 우선 차려주면서 내 가족 밥상의 평화를 기원하는 게 하늘의 응답을 듣는 길은 아닐까 싶다.
지금 중국산 위험한 식품 소동은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돈독 오른 중국인들을 경계하기보다 독려해온 중국식 시장경제 실험의 뒤틀린 초상이다. 사람의 얼굴을 잃으면 그게 무슨 주의, 어떤 이념이라도 다 치명적 부작용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린 너무 가벼이 여기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