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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여성회 : 여성평화뉴스레터


한국의 성매매 체제: 공창, 위안부, 그리고 양공주 만들기 1)


- 이나영(중앙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I. 서론

본 논문의 목적은 공식적인 금지주의와 병행하여 대한민국에 지속되어 온 국가규제 성매매체제를 역사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일제시대의 공창제도와 미군정의 공창제폐지령, 한국전쟁 당시 성매매 규제방식, 박정희 군사정권의 윤락행위방지법 등의 제정 배경과 실행 과정을 추적함으로서 표면적인 성매매체제의 변화와 별개로 지속되어 온 규제주의(합법화) 관행의 원인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은 1948년 시행된 「공창제도등폐지령」에 이어 1961년 제정된 「윤락행위등방지법」, 2004년 9월부터 시행된 「성매매방지법」등을 근간으로 금지주의(prohibition)와 범죄화(criminalization)를 성매매에 관한 정책적 입장으로 채택해 왔다. 그러나 정책이라는 형식 속에 숨어있는 실질적인 문제는 공식적 금지주의와 실제 실행체계와 집행과정 사이의 간극이다. 기지촌 성매매, 법적규제를 받지 않는 ‘특정지역’의 존재, 집창촌의 문제 등 성매매 유지에 국가가 개입하거나 최소한 암묵적으로 묵인 혹은 동조해 왔다는 여러 가지 역사적 정황들로 미루어 볼 때, 대한민국이 과연 국가 통치 정책으로 성매매‘금지’를 ‘실행’해 왔는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금지주의(prohibition)에서는 성매매가 불법으로 규정되고 성매매 관련자 모두 처벌의 대상이 되는 반면, 규제주의(regulation)는 성매매를 운영하는데 국가가 개입한다는 특징을 지닌다고 볼 때, 대한민국에는 공식적인 금지주의와 비공식 규제주의가 역사적으로 혼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연구자는 이를 다른 논문에서 ‘위선적 금지주의’라고 명명한 바 있다(2007a).

필자는 이에 국가에(를 문제시)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국가 간 경계를 넘어서는 인신매매, 성매매의 확대 및 글로벌 성산업의 활황을 목도하면서 필자는 초국적 자본주의와 젠더체계, 제국주의와 군사주의의 제도적 장치들의 치밀한 연결망과 그 견고함에 절망한다. 따라서 본고에서 필자는 '성매매방지법' 자체가 지닌 모순점을 점검하지 말자거나 집창촌(집결지) 중심의 실행과정의 문제를 ‘문제삼지’ 말자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많은 ‘문제들’(여전히 해결이 난망한)을 배태한 원류를 이 시점에서 다시 한 번 점검해 보자는 것이다. “법과 공권력에 의지하는 근절의지는 문제 있다”는 고정갑희의 주장(2005: 15)은 타당하다. 법과 공권력의 불완정성과 이에 잠재한 반여성적 성향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에서 법과 공권력은 특정한 문제해결 과정의 도구적 존재이자 미봉책, 심지어 근본적인 문제를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불과해 왔다. 저자는 법과 공권력이라는 것이 어떠한 정치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인지 역사적 교훈을 통해 ‘우리’가 여전히 떠안고 있는 포괄적인 구조의 문제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 논문은 대한민국에서 성매매 체제가 어떻게 형성, 유지, 변형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탐구를 통해, ‘공창,’ ‘위안부,’ ‘양공주,’ ‘기생,’ ‘창녀’라는 기표 및 실재가 만들어지는 배경 및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일제 식민지와 연관된 ‘위안부’ 문제, 미군주둔과 기지촌의 문제, 외화벌이와 기생관광 문제, 남성중심의 성문화의 피해자로서 성매매 여성의 문제, 지구화와 이주의 문제로 인해 새롭게 부각되는 외국인 여성 인신매매 현상 등이 각각 단절된 역사적 국면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 국가 성매매체제의 연속선상에서 ‘구성’된 것이라 주장하고자 한다. 궁극적으로 ‘필요악’으로서 존재해야 하지만 구분되고 격리되어야 할 ‘더러운 몸’으로서의 ‘매춘’여성이라는 한국 가부장의 이중적 성인식과 태도의 형성 및 유지 방식, 이에 공모하거나 조장한 민족국가에 문제제기하고자 한다.

2. 일제시대(1910-45): 국가규제 성매매제도의 확립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해 조선이 개항된 후 개항지에서 일본인을 상대로 한 성매매업이 조선에 성행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인 이주민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요리점과 음식점에서도 성매매가 증가하였고 조선인 성매매여성들의 수도 증가하게 되자 일본은 일본인 거류지를 중심으로 성매매 단속을 위한 여러 규칙들을 제정하고 집창화를 준비해 나갔다(한국여성연구소, 1999: 292-293). 그리하여 1904년, 4월에는 일본공사관이 '경성영사관령 제3호'를 발효하여 기생과 창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 ‘창기’를 ‘불특정 다수인들을 상대로 성교를 하고 그 대가를 지불받는 직업’인으로 그 정체성을 규정하였다. 이는 1908년 9월 한국 경시청이 내린 <기생 단속령, 창기 단속령>에서 재확인되었다. 마침내 강점이 확정된 1910년, 조선 통감부가 경무총감부령으로 <유곽법창기취체규정>을 내려 공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에 이른다(박종성, 1994: 64-66). 공창의 인정은 조선의 전통적 기생을 식민지 자본주의 근대 공간으로 재배치함으로써, 그들이 지닌 풍류, 예, 쾌락의 섹슈얼리티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단순한 매매의 대상으로서 집단적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과정이었다. 이는 기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의 변화, 지위의 변화와도 연관된다. 서지영(2004)은 관기제도의 폐지이후 요리집 등 영업현장에서의 기생의 활동이 전근대 시대 여악으로서의 전통적 관기 이미지를 약화시키면서, 기예를 상품적 가치로 전이시키고 기생의 연희접대부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화시켰다고 주장한다(134-135). 1908년 관기제도가 폐지되고, 서울과 지방의 기생들이 기생조합의 형태 속에 재조직화되면서 일본 예기제도가 도입되었는데, 1915년 이후에는 정식으로 일본식의 ‘권번’이라는 이름을 따르게 된다(서지영, 2004: 134). 또한 기생조합 형태인 권번제도는 기생을 시간과 돈의 단위 속에 움직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전근대 시대의 풍류의 내용 역시 상업적 구도 속에 재편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136). 기생에서 종별화된 집단으로서 ‘창기’로의 재조직화는 전통적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을 차별, 분리, 배치하는 성별이데올로기의 연속선상에서 근대 자본주의와 식민공간에 일제의 통치기구들이 수렴된 결과였으며, 근대적 의미의 ‘창녀’라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 반도 전체에 공창제도를 통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1916년 3월 통감부 경무총감사령부령 제3호 <예기작부치옥영업취체규칙> 및 동4호 <조선대좌부창기취체규칙>을 공포하였다. 이는 각도 경찰서장이 지정한 장소에서만 공창 영업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는 것으로써 유곽으로 상징되는 조직적 관리 성매매 형태인 공창제의 본격적인 도입이라 볼 수 있다(한국여성연구소, 1999: 293). 이후 기생은 예기(기예를 업으로 하는 일본 여인), 기생(한국여인으로 같은 일을 하는 자), 창기(불특정다수인에게 성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자) 등으로 세밀하게 구분되어졌다(박종성, 1994: 66-67). 이제 한국의 가부장제 전통 중 하나가 ‘근대’라는 이름으로 덧칠된 채 일제의 통치기구 안으로 흡수, 변형되게 된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일본군 위안부’ 모집에 공창제도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930년대 중국과의 전쟁을 배경으로 일본군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창기단속제도’라는 이전의 공창제도의 틀을 넘는 폭력이나 사기와 같은 흉악한 수단에 의한 군대 ‘위안부’ 모집이 시작”되었다(후지메 유키, 2007: 127). 식민지 여성에 대한 강제동원 등 군위안부와 공창제도는 명백히 차이점을 지니고 있지만 위안소 제도의 역사적 배경, 경영 및 위안부 위생 검사 등 공창 제도와 기본적인 골격을 같이 한다(정진성, 2003: 200). 무엇보다 국가규제 성매매제도라는 시스템과 이를 지탱해 주는 광범위한 인신매매의 행태가 없었다면 일제가 그토록 단기간에 조직적으로 많은 조선 여성들을 군대위안부로 동원하지는 못했을 것이다(Yoshiaki, 2000: 205).

이처럼 일제는 전근대적인 한국의 기생제도에 일제의 공창제도를 착종했으며, 이를 기반으로 식민지 여성을 효율적으로 통제, 지배하였다. 국가규제 성매매제도인 공창제의 가장 큰 구조적인 특징을 등록제, 정기적 검진, 특정구역 지정을 통한 집단거주(제한)(집창화), 성을 파는 여성들의 공간적 구획화, 정체성의 종별화라고 볼 때 미군정은 일제의 기본적인 틀과 실행체계를 그대로 계승한다.

3. 미군정 시기(1945-48): 국가규제성매매제도에 착종된 금지주의

해방직후, 1945년 9월 8일, 하지 중장이 이끄는 미24사단이 인천항에 상륙한 이래, 1948년 8월 대한민국의 건국에 이르는 약 2년 11개월간에 걸쳐 미군정은 남조선 유일의 실질적인 권력 주체로 기능하였다. 미군과 군속들의 숫자는 급속하게 늘어나서 1945년 연말에는 72,000명에 육박하였는데, 완전한 철수는 1949년 6월 30일에야 이루어진다(이나영, 2007a: 42).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제7사단(경기도, 충청북도, 강원도 주둔), 제40사단(경상남북도 주둔), 제96사단(전라남북도 주둔), 등 3개의 주력 사단과 제308전폭비행단 및 군수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이들 정규 병력 이외에도 각 도청소재지(제주도 제외)에는 군정 그룹이, 시군 지역에는 군정 중대(1945년 11월 20일 현재 41개 중대)가 배치되었다(서울신문사, 1979; 이임하, 2004b: 268 재인용).

매춘에 관한 미국방성의 공식적인 입장은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었으며(Yom, 2004: 67), 성매매를 불법화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는 미국의 금지주의 정책에 상응하고자 하였다. 1941년 미의회가 제정한 일명 ‘메이법’(May Act)은 “육군과 해군의 [전투력의] 효율성, 보건, 복지”를 위하여, 군 그리고/혹은 해군 시설로부터 “매우 적절한”(such reasonable) 거리 내에서 성매매에 관여하는 것, 성매매를 돕거나 부추기는 것, 혹은 성매매를 목적으로 알선, 권유하는 것 등에 대한 불법화를 천명한 것이다. 이 법안에는 “성매매에 관여하거나 돕거나 부추기는 누구든지” 벌금(1천 달러 이하) 혹은 1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다(Title 18. Crimes and Criminal Procedure).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성적충동과 욕구의 배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이로 인한 여성과의 섹스, 특히 외국여성에 대한 “성적 탐험”은 여전히 군대내 경험에 있어 불가피한 부분으로 간주되었다(Yom, 2004: 67-68). 따라서 미군에게 유곽지역에서의 성매매는 비공식적으로 ‘허가된’ 위락의 한 형태였으며(Brant, 1985: 52) 한반도에서의 ‘매춘정책’ 또한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4일 미군정령 제1호(Ordinance No.1)로 ‘위생국설치에 관한 건’을 발표한다. 미군정은 “청결과 위생 개념의 부재” 때문에 “동양이 이질적이고 무서운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지적하고(Meade, 1951: 218-219), 미군 병사들의 안전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정은 “‘엄격한 검역 규제”를 통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보건의식과 수준을 향상키 위한 “일본의 노력”을 칭송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 인구의 공중위생은 최저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불평했다(Public Health Problems of South Korea 1950, 9-12).

미군정법령 제 18호(Ordinance No. 18)는 1945년 10월 27일 복지 기능을 부가하기 위해 보건후생국(Bureau of Public Health and Welfare)으로 바꿨으며, 법령 제 25호(Ordinance No. 25)는 1945년 11월 7일 각 도에 보건후생과(Department of Public Health and Welfare)를 설립하였다. 1946년 3월 29일 보건후생국을 보건후생부로 확정한 후, 같은 해 10월 23일 미군정법령 제 114호(Ordinance No. 114)에 따라 각 지방의 보건후생과(Departments of Health and Welfare)를 보건후생국(Bureau of Public Health and Welfare)으로 바꾸게 된다(Public Health Problems of South Korea, 1950: 12-13).

당시 한반도 주둔 미군당국자들의 공통된 관심사 중 하나는 “청결 시설의 부족을 야기하는 성매매 여성 혹은 성구매자의 열악한 생활조건”에 대한 염려였으며(McNinch, 1954: 145), “불결한 비-미국인” 성매매 여성에 대한 통제는 미국 병사들의 보건복지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간주 되었다. 이에 미군정은 1945년 9월 11일, 서울에서 군의무대(Office of corps surgeon)를 개소하고 잇달아 성병진료소를 개설하였으며, 병원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군의무대의 통제 아래, 의료 검사관들은 술집과 레스토랑을 찾아다녔으며, 성병 통제 사무관들은 유곽 지역과 성매매(위락) 업소를 조사했다. 또한 미군 의무장교는 당시 미군 출입 금지 구역인 집창지역에 매주 방문하여 성병 감염 여부를 검사하였다(이임하, 2004b: 285). 그들의 권고에 따라, 예방 시설이 계획되었고 성매매에 대한 최초의 정책이 연이어 나오게 되었으며(Office of the Surgeon General Department of the Army Washington D.C. 1963, 497), 보다 효율적인 관리전략을 논의하기 위해, 지휘관, 군목(軍牧), 특별업무부(special service division; 오락이나 여가 프로그램과 시설들을 제공), 헌병사령관, 의무부 등이 관여하여 <성병통제 위원회(VD Control Councils)>가 설립되었다. <성병통제 위워회>는 매달 회의를 열고 각 부대단위별로 보고를 받으며 성병감염 추이를 세심하게 살피면서 성매매 관련대책을 제시하곤 했다(이나영, 2007a: 52-53).

공창을 비롯하여 성병전염이 의심되는 모든 ‘위험한’ 여성들은 성병검진의 대상이 되었는데, 최초의 검진은 1946년 3월 명월관, 국일관 등에서 일하는 서울시내 4대 권번 기생들을 대상으로 한 체혈검사였다고 한다(조선일보, 5월 7일; 이임하, 2004b: 284). 이후 군정청 지시로 후생부가 주도하여 서울 시내 각 권번 기생들에 대하여 성병 검진이 실시되었고(동아일보, 1946년 7월 24일), 당시 미군정은 이전의 검진결과 60% 이상의 여성들이 (성병에) 감염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이에 성병 검진의 정당성을 강변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성병검사는 미군정 실시 당시부터 정기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동아일보, 1946년 12월 10일). 1947년이 되자 미군정은 “시민의 보건후생을 기하고” “화류병근절책”의 명분을 들어, 공창은 물론 여급기생들까지 정기적인 검진을 실시하고 건강증명서를 교부하여 사창을 통제하고자 하였다(조선일보, 1947년 4월 12일). 보다 효과적인 점검을 위해, 미군정은 1947년 5월, 보건후생부 산하에 성병 통제과(Section)를 설립하고, 일제에 의해 시행된 성병 통제 프로그램의 이용 이외에도 질 검사의 새로운 기법을 도입하기도 하였다. 점차 기생, 여급, 댄서, 접객부, 웨이트리스 등 모든 “접객업자”들은 정기적인 검진과 처치의 대상이 되고, 건강 증명서 발급을 종용받았으며(7/27/1948, Headquarters, USAMGIK, APO 235 Unit 2; 동아일보 1946년 12월 10일; 조선일보 1947년 10월 12일), 신체검사에서 통과하지 못한 이들은 허가를 받지 못하거나 기존의 허가조치를 취소당하였다(7/27/1948, Headquarters, USAMGIK, APO 235 Unit 2). 성병에 감염 되었다고 판명된 여성들은 당시 성병감염자들의 치료를 주로 담당하던 국립성병센터(1947년 12월 개설)로 보내지거나(USAFIK 1947, No.27, 175) 성병에 감염된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으로 1947년 12월, 서울 최초의 국립성병센터(National Venereal Disease Center)가 공식적으로 개설되었다. 개소 후 첫째 달에는 191명의 환자들이 치료 받았지만(USAFIK 1947, No.27, 175), 이듬해 2월 말 진료 환자 숫자는 매주 2~3백까지 증가했다(USAFIK 1948, No 29 (February), 191). 이후 미군정은 서울뿐만 아니라 성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기관을 확대하여 광주, 부산, 대구에 각각 한 개의 성병 클리닉과 각 지역 보건소에 성병 클리닉을 설치하였고 이와 별도로 여자 경찰관에 의해 붙잡힌 창녀들을 위해 서울, 부산, 대구, 인천에 있는 여자 경찰서에 4개의 시약소를 설치하였다(신오성, 1989: 58). 성병에서 완전히 낫기까지 여성 감옥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방면되었을 때에도, 완치가 의심되는 매독환자들에게는 지속적인 치료가 강제되었다(USAFIK 1948, No 29 (February), 191). 보건후생부는 1947년 5월에서 1948년 7월까지 일여년 동안, 모두 14,889명의 성매매여성들(성매매가 의심되는 여성들 포함)이 검사를 실시하였고, 이들 중 59.8%가 성병에 감염된 것으로 보고하였다(7/27/1948, Headquaters USAMGIK APO 235 Unit 2).

성매매의 효율적 관리를 위해 미군정은 일제당시 공창지역(집창지역)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한 보고서는 일제의 등록제 성매매 덕분에 성매매 여성들의 거주를 “[미]헌병대에 의해 성공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좁은 지역으로 제한시킬 수 있게 됨으로써, 높은 접근성과 효율적 통제 가능성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Report from Joseph T. Caples, Lt. Col. MC Surgeon, Titled "Factors Influencing Rates, VD Rates during the Last Six Months of 1948 and January 1947," 2 February, 1949). 실제 공창지역은 매주 실시되는 성병검진을 용이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주둔부대에서 성병을 최소화”하고자 하던 미군의관의 요청에 따라 1945년 후반부터 미국 병사들에게 “출입허가구역”(on limits)이 되기 시작했다(Meade, 1951: 220-221). 또한 성병 자문위원회는 사병들의 성적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사병 서비스 클럽들이 단위 지역에 가급적 가까운 곳 혹은 단위 지역 안에 위치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5/11/1948, Headquarters XXIV Corps, APO 235).

미군이 일제공창지역을 활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대부분의 미군기지들이 일제시대에 건설된 군기지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부평은 1945년 9월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한국 최초의 기지촌이 형성되었데, 원래 일제가 1930년대 만주 사변을 지워하기 위해 건설한 병참기지이자 공창지구이기도 했다. 미군은 일제에 의해 건립된 대규모의 조병창 건물을 활용하여 보급수송본부(Army Support Command Korea (ASCOM))를 만들고 남조선 주둔 전미군 부대에 대한 병참, 보급, 수송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는 캠프 그랜트(Camp Grant), 캠프 마켓(Camp Market), 캠프 타일러(Camp Tyler), 캠프 헤이즈(Camp Hayes) 등을 망라하는 광범위한 군기지였다(이임하, 2004b: 279; Yuh, 1994: 14; Global Security, 2006). 미8군 사령부의 주둔으로 형성된 이태원 지역 또한 일제 사령부의 심장부로 미군 사령부는 당시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부산의 하야리아 부대 지역도 일제 군사령부를 미군이 대체한 것이었다. 따라서 상당수의 일제 공창지역(집창촌)이 미군 기지촌으로 변화하였는데, 2007년 현재까지 존재하는 집창촌인 용산, 부산 완월동, 범전동(미 ‘하야리야’ 부대 입구), 대구 도원동(소위 ‘자갈마당’), 대전 중앙동(구, 정동) 등이 일제시대 유명한 공창지역이었다가 이후 미군기지촌으로 활용된 대표적인 지역이다(여성인권중앙지원센터, 2007).

미군정은 성병통제의 효율성의 맥락에서 미국 병사들만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른바 “도시 클럽”(City Club)의 존재 또한 묵과했다(Ward 12 April, 1948). 한국인(포주)이 운영하고 관리하며, 정기적 성병검진을 받는 등록된 성매매 여성들이 미군병사들만을 상대하는 형태의 미군클럽은 향후 한국 기지촌 성매매 시스템의 원형이 된다. 미군병사 전용클럽 이외에도 미군을 상대로 하는 성매매는 땐스홀, 카바레, 빠, 카페 등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였다. 1946년 8월 말 현재 서울시내 허가받은 미군상대 유흥업소는 카바레 4개, 빠 59개, 카페 12개, 고급 요리점 31개, 일반 음식점이 322개로 조사되었는데, 그해 연말 정식으로 허가받은 유흥업소는 카바레 29개, 빠 81개, 카페 32개, 1종 요리점 35개, 땐스홀 5개로 증가하였다고 한다(자유신문 1946년 12월 13일; 이임하, 2004a: 277 재인용).

남조선에서 실질적인 점령군으로서 기능했던 미군은 ‘해방군,’ ‘자유민주주의의 전령사’라는 이미지를 구성하고자 했으며, 여성관련 정책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6년 5월 17일, 군정청법령 제70호 「부녀자의 매매 또는 기매매계약의금지」를 발포하여, 부녀자의 인신매매를 금지하였으며(법제처, 1952: 26), 당해 9월 14일 미군정 법령 제107호 「부녀국설치령」에 의해 보건후생부내에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담당 행정조직인 부녀국(Women's Bureau)을 설치하고, 부녀국장으로 친미파인 고황경을 내세운다(USAFIK 1948, No.34(July-August)).

부녀자의 매매를 금지시킨 법령은 처음에는 공창제도의 즉각적인 폐지로 인식되어 당시 여성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1946년 5월 29일, “부녀자의 인신매매만 금지할 뿐 공창을 폐지하는 것은 아니며 또한 공창폐지 계획은 없다, 자진해서 창기가 된 경우는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는 요지의 러취 군정장관의 기자회견 내용이 발표(한성일보, 1946년 5월 29일; 문경란, 1989: 117 재인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공창제도 자체가 폐지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좌우익 여성연대체인 <부녀단체총결속 폐업공창 구제연맹>(<폐창연맹>으로 불림)의 적극적인 폐창운동과 언론의 압박에 의해 마침내 1947년 11월 14일, 입법의원이 제정하고 군정장관이 인준하는 형식을 취하여 남조선과도정부 법률 제7호로서 「공창제도 등 폐지령」이 공포되었고, 발포 3개월 후인 1948년 2월 14일부터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이나영, 2007a: 46).

법률 제7호를 자세히 살펴보면, “1조. 본령은 일정이래의 악습을 배제하고 인도를 창명하기 위하여 남녀평등의 민주주의적 견지에서 공창제도를 폐지하고 일체의 매춘행위를 금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 2조 1916년 3월 경무총감부령 제4호(유곽업창기취체규칙)는 이를 폐지한다…제 3조 나항. 매춘의 행위를 하며 또는 그 매개, 장소 제공을 한 자(매매알선행위처벌)...2년 이하의 징역이나 5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한다(군정법령집, 1952: 28)”고 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공창제도를 폐지하고 유곽업창기취체규칙을 폐지함으로써 유곽영업이나 창기가업의 허가를 무효화한 이 법안은 ‘매춘행위’와 연관된 자들에 대한 처벌규정만 둔 채, ‘매춘’자체가 불법이라고는 규정하지 않았기에 비불법화(not illegal)와 형법조항을 통한 처벌주의가 병행된 법안으로 평가받는다(최병각, 2004; 문현아, 2007: 107-108).

공창제폐지령으로 인해 이른바 국가규제 성매매 법안은 폐지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성매매가 폐지된 것을 아니었다. 인신매매금지령 이후 “1946년 7월 한달 동안 1백 20명의 창기가 새로 늘었다”(동아일보, 1946년 8월 10일)는 보도에서와 같이 공창은 오히려 늘어났으며, 1947년 10월 20일 현재, 전국의 공창 수는 총 2,214명이었고 기록되어 있다(이배용, 1996: 168; 황정미, 2002: 174). 공식적인 공창제 폐지 이후에는 사창과 사창지구(quarter)의 숫자는 “통제할 수 없는 규모”로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이는 식민지배로 인해 피폐해진 공간에서 계급과 상관없이 절대빈곤에 시달리던 많은 여성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이중 상당수가 사창에 유입되곤 했기 때문이다(조선일보, 1947년 4월 12일). 일제말기 일본, 만주, 중국, 남양 등지로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들 중 해방이후 전재민으로 고국에 돌아온 후 생계를 잇지 못하고 창기로 전락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한성일보, 1946년 5월 28일; 문경란, 1989: 116). 1947년에는 그 수가 7-8천명에 이른다고 한성일보는 기록하고 있다(한성일보, 1947년 8월 2일).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공창제가 폐지된 이후, 표면상 금지주의가 선언되고 미군당국은 이를 집행할 수밖에 없었지만 사실상 성매매는 미군에 의해 지속적으로 관리되었다는 점이다. 1948년 5월, 미군들은 성병감염율의 증가가 “전국적인 성매매의 창궐” 때문이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최근의 법령 수립[공창제폐지령]”이 원인이라고 지목하였다(5/21/1948, Letter from Orlando Ward, Major General, U.S. Army Commanding to Lieutenant General R. Hodge). 그들은 “적법한 성매매를 불법화하는 법률 제7호의 집행”이 사실상 성매매 여성들의 활동을 관리, 통제하기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불평하였던 것이다(5/11/1948, Headquarters 24th Corps, APO 235). 이들은 또한 ‘창부’들이 미군사재판소(Army Provost Court)에서 재판을 받고 징역형을 치르던 관행이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과 더불어 종식을 고할 것이며 이는 창녀들의 활동에 대한 통제불능을 야기할 것이라 우려하였다. 이들의 우려는 성매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성병 통제불능에 대한 것이였어며, 그러한 미군의 불안감은 1948월 4월 5일 있었던 성병통제회의 보고서(VD control meeting)의 “2월 14일 공창제 폐지 전에 모든 창부를 검진해야한다”는 지적에 반영되어 있다. 실제로 1948년 국립병원과 보건후생부는 전국적인 조사를 실시하고 기생, 웨이트리스, 하인, 댄서, 기타 유형의 성판매자들의 66.6%가 성병에 감염되었다고 지적하고 있다(신오성, 1989: 57). 대부분의 남한 지역에서, 보고된 성병 비율은 1948년 한해에만 군사 1천 명당 1백 명이었다(1/22/1949, Headquarters Special Troops USAFIK APO 235). 1948년 4월 30일에 있었던 미주둔군(USAFIK)의 갱생 센터에 따르면, 22,823명 중에서 감염된 147명의 훈련병 전체가 갱생 센터로 보내졌는데, 그중 79%(116명)가 임질이었고 14%(21명)는 매독이었다고 한다. 갱생 센터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9월 15일에 폐쇄되었다(8/14/1948, USAFIK APO 235). 1949년에도 미군은 기생과 웨이트리스에 대한 성병조사를 하였고, 이들 중 60%가 한두 가지 이상의 성병에 감염된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당시 검진이 ‘요망’되는 ‘접객부entertainers’는 56,974명이었는데 이중 53,664명이 실제 검진을 받았다(2/26/1949, Headquarters USAFIK, APO 235, 26 February 1949, Lecture “Treatment of Venereal Diseases and Its Limitations,” 1-2 in the Subject titled “Venereal Disease Control”). 이러한 사실을 빌미로 성매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병검사, 감염자에게 대한 성병 검사와 감금, 치료는 1949년까지 계속되었고(2/26/1949, Headquarters USAFIK, APO 235, No. 726.1), 성병자문회의 또한 지속되었다. 또한 미군을 상대로 하는 서비스 클럽(service clubs)과 댄스홀은 공창의 폐지 이후에도 여전히 ‘합법적인’ 미군 여가 시설로 존재하였으며, 미군병사들과 성매매 여성들이 접촉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특히 인천의 서비스 클럽 주변 지역은 미군 병사와 한국 포주가 접촉하는 곳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9/28/1948, 61st Ordinance Group APO 901). 결론적으로 미군정은 남한에서 성매매를 금지하는 대신에 관리, 통제(regulation and control)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공창제폐지령과 무관하게 미군정은 미군기지를 건립하는 한편, 성병 자문회와 성병 통제과의 설치, 정기적 성병검진 실시, 증명서 발급, 기지의 안과 밖에서의 사병 클럽 운용 등, 다양한 장치들을 통해 지속적으로 성매매를 관리해 왔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의 국가관리 성매매 체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사실상 일제가 확립한 성매매 국가규제시스템과 군사시설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위선적 금지주의, 혹은 실질적 국가관리주의(규제주의)는 남성병사들의 성욕 장려와 성병의 효율적 통제라는 미군의 원칙과 더불어 종전 후 한반도에 현재까지 존재해 온 기지촌 관련 미군정책의 기조를 이룬다(이나영, 2007a: 59-60).

* 본 논문은 2008년 <한소리회> 주최 국제심포지엄(10월 16일)의 발표문이며, 본문의 주요 내용들은 필자의 다음 논문에 기초했음을 밝힙니다: “금지주의와 국가규제 성매매 제도의 착종에 관한 연구: 남한의 미군정기 성매매정책을 중심으로“(2007), 『사회와 역사』, 제75집, 39-76; “기지촌의 공고화 과정에 관한 연구(1950-60): 국가, 성별화된 민족주의, 여성의 저항”(2007), 『한국여성학』, 제23권 4호, 6-48. 따라서 인용을 원하시는 분은 원문을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 원고를 싣게 허락해주신 이나영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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