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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여성회 : 여성평화뉴스레터


동북아여성평화회의 일정 따라나선 개성관광 기행문


홍승희(평화여성회 웹진편집장)

여러 절차만 없으면 서울에서 1시간 반~2시간에 갈 수 있다는 개성, 그러나 그 곳까지 가는 길은 아직 멀다. 국경을 넘나드는 절차의 번잡함 때문이다.

출국 심사도, 입국 심사도 양측 모두에서 들 때, 날 때 다 거쳐야 하고 달러 환전까지 해가야 하는 외국 여행이다. 우리의 이상 속에 민족은 하나일망정 현실 속에서 국가는 둘임을 분명히 느끼는 계기를 그곳, 양측의 출입국 절차들을 거치며 얻게 된다.

그러나 남들로부터 전해 듣는 것으로만 알던 북쪽의 실질적 모습들을 비록 겉보기에 불과하지만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관광 사업을 본격화 해 달러를 벌어보려 안간힘을 쓰는 북측의 노력을 뚜렷이 볼 수 있는 여정인 한편에선 여전히 더딘 개방만큼이나 아직 외부 세계와의 소통에 서툰 모습도 함께 바라보게 되는 여행길이었다. 이 글은 개성관광을 통해 최초로 북쪽 땅을 밟은 남쪽 사람이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를 개인적 체험을 통해 나누려 펼치는 마당이다.

필자는 사흘 일정으로 진행된 동북아여성평화회의 마지막 날인 9월3일의 예정된 일정을 좇아 40명 국내외 일행과 함께 개성관광 길에 올랐다. 집에서 1시간 반 거리인 대방동 여성플라자에서의 5시30분 집합 시간을 맞출 방법이 없어 행사요원들과 함께 여성플라자에서 1박을 하고 6시, 아직 온전히 밝지도 않은 여명에 버스에 올라 긴장과 흥분이 어우러진 개성행이 시작됐다.

남과 북 각각의 출입사무소가 있어서 나가는 절차와 들어가는 절차를 오갈 때마다 반복한다. 관광객들이야 외국여행 다닐 때면 늘 겪음직한 일인지라 그러려니 넘어갈 문제지만 개성공단으로 출퇴근하는 기업 관계자들로선 참으로 속 터지겠다 싶은 안타까움이 일었다. 사전 신원조회는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다행히 비자를 발급받는다거나 하는 추가절차는 없어서 접수 며칠 만에 후다닥 참가신청이 받아들여지는 개인적 경험을 했다. 덕분에 개성관광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제대로 설명 받지 못해 달러를 바꿔가야 하는 상황을 미리 생각지 못했다. “아, 역시 다른 정치·경제 공간으로 가는 거구나”를 실감하며.

남측 출입사무소가 있는 도라산 역사 안에 설치된 간이 은행창구에서 20달러만 환전했다. 워낙 해외여행 중에도 무얼 사들고 다니는 편이 아닌데다 딱히 무엇을 사겠다는 계획도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소액을 바꿨다. 결과적으로는 그 정도나마 바꾸질 잘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차편에 밥도 물도 다 주는 관광여행이지만 그래도 관광지에서 파는 특산 차 한 잔 사마시는 재미를 맛보고 우리의 아이스크림과는 어떻게 맛이 다른지 궁금한 얼음보숭이를 맛보는 여유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다시 출입사무소 시간대로 돌아가 얘길 해보자. 어느 사회에서든 관청이 하는 일은 대기하고 수속하고 이래저래 많은 시간이 든다. 그나마 이번 여행길에서는 민간인 개성 관광 사업을 성사시켜 진행하고 있는 현대아산 직원들이 나서서 신속한 처리가 이루어졌다.

9시쯤이면 개성의 관문을 넘는다. 그때부터 남쪽의 문화와는 다른 북측의 공기를 살짝살짝 느끼며 관광이 시작된다. 북측 출입사무소에서부터 북측 안내원이 동승해 지정된 관광지들을 돌며 설명도 하고 심심찮게 우스갯소리도 들려준다.

평화운동가들로 채워된 우리 버스와 달리 다른 일반 관광객들은 버스 안에서도 긴장을 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관광버스 기사가 들려준다. 그런 관광객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배려인지 음담패설까지 늘어놔 왠지 긴장을 다 풀지 못하는 관광객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이번 관광길에는 우리 일행이 탄 버스를 포함해 총 10대의 버스가 함께 했다. 버스기사의 말로는 본래 평균 16대 정도가 열 맞춰 관광길에 나섰으나 근래 발생한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 이후 이 정도로 줄었다고 한다.

그 대신 우리는 새로 개방, 추가된 관광코스를 맛볼 수 있었다. 송도3절이라며 개성 사람들이 자부심을 갖고 아끼는 박연폭포, 그 전 관광객들도 가봤을 선죽교와 표충비, 그리고 정몽주 생가 터에 조선 유학자들이 세웠다는 서원 및 사당이 있는 숭양서원, 고려시대 최고의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후일 성균관으로 개칭) 자리를 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 고려박물관 관광을 마치면 박물관 앞에 마련된 기념품점에 들르도록 시간이 안배돼 있다. 그 중간에 점심식사가 개성시 통일로의 출발점 근방에 지어진 통일각에서 제공됐다. 언덕 꼭대기에는 김일성 동상이 통일로를 내려다보도록 자리 잡고 서있다.

이쯤에서 일단 관광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박연폭포

박연폭포를 가자면 개성시내를 관통해야 한다. 박연폭포를 향해 가는 시간은 아침 출근을 마친 시간이라서인지 거리에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도심의 건물들이나 변두리의 집들은 대부분 70년대 초반 혹은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들인 듯 몹시 낡았다.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쪽보다 앞섰던 경제사정을 반영하듯 당시의 서울 일반 주택가 건물보다는 현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오랜 기간 손보지 못한 흔적인 역력했다. 5층 혹은 10층짜리 아파트들이 간간이 서있지만 그 역시 낡고 손질 받지 못한 퇴락한 모습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그 낡은 아파트일망정 베란다에 화분을 가꾸는 정서는 일부일망정 살아있음에 묘한 출렁임이 가슴 속에 일었다. 2차 대전의 패전을 경험하고 살인적 물가고에 시달리던 베를린 여성들이 식료품 하나를 덜 사고라도 꽃을 사던 모습이 세계인들에게 신선하게 비쳐졌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저런 감성, 저런 여유라면 참으로 희망이 있지 않겠는가 싶었다.

개성시내라고는 하지만 도시 규모는 60,70년대 우리의 읍 소재지 정도로만 보인다. 실제 인구는 40여만 명이라니 우리의 중소도시 규모는 되겠으나 도심지에 상권이 발달해 있고 그 주변 가까이에 주택이 밀집한 도시 구조가 아니어서인지 보기에는 훨씬 초라한 도심의 모습을 보인다.

도심을 벗어나 박연폭포까지 가는 길에는 논·밭이 공터 없이 들어차 있다. 산이 많은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농지는 넓히기 어려워 보인다. 논은 매우 드물고 대개는 밭이다. 좁은 농지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의 결과인양 웬만한 동산까지는 꼭대기까지 개간이 이루어져 있다. 반면 군데군데 일부러 밭을 없애고 인공 조림을 하려 애쓴 흔적들이 보인다. 아마도 저런 꼭대기까지 진행된 농지화의 결과 홍수 때 모두 쓸려나가는 참사들을 겪었던 듯하다.

개성 인근의 산 가운데는 숲이 무성한 곳이 많지 않다. 키 작은 나무도 드물고 듬성듬성 인공식수를 한 표만 나는 민둥산들이 더 많았다. 지난 홍수 피해들이 얼마나 대단했을까를 미루어 짐작해보게 한다.

심어진 농작물들은 근교농업이 도시민을 위한 채소류 및 화훼류 재배를 주로 하는 남쪽과 달리 옥수수와 고구마가 주로 많았고 콩의 일종인 동부가 일부 심어진 듯했다. 차창으로만 봐서 다소 부정확한 관찰일 수도 있을 것이나 다른 농작물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럴 때 안내원에게 뭘 좀 물어보면 좋겠으나 본격 관광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그들이 난처해할지도 모르니 질문을 하지 말라는 주의를 들었던 터라 섣불리 묻기도 어려웠다. 혹여 그들이 자존심 상할 질문일지도 모르기에.


버스는 드디어 민가도 없는 산길로 접어든다. 구불구불한 비포장 길을 버스로 달리는 상황은 메모 한자 할 엄두를 못 내게 한다. 그런 차 안에서도 북측 안내원은 관광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려 끊임없이 이런 저런 설명을 펼쳐나간다.

박연폭포야 가서 보면 될 테고 송도3절의 제1은 황진이라며 그녀와 관한 여러 전설, 설화들을 들려주고 박연폭포를 읊은 황진이의 시 하나를 멋지게 낭송한다. 황진이와 화담 서경덕에 얽힌 이야기들을 넉살을 섞어가며 들려주는 모습이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러다 은근슬쩍 음담패설을 늘어놓는데 아슬아슬 경계는 넘지 않는 수준이 역시 프로 가이드의 면모를 드러낸다. 북쪽의 최신 가요 한 가락도 멋들어지게 불러 제친다. 낯선 관광길의 긴장을 슬그머니 풀어내는 솜씨가 만만찮다.

마침내 도착한 박연폭포, 그 길가에도 안내원의 허락 없이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금지들이 곳곳에 있다. 그 가운데는 외국인 숙소라는 건물도 있어 외부 관광객인 남쪽 사람들을 의아하게 한다. 당시는 비어있는 듯한 그 건물이 아마도 명승지마다 세워진 고위층을 위한 숙박시설이 아닌가 여겨진다.

차에서 내려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시원하고도 맑은 물줄기가 상당한 높이에서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 장관인 박연폭포를 만난다. 아메리카 대륙의 수량 풍부한 폭포들과 비교하면 아무래도 한반도의 폭포들은 너무나 소박하다. 그러나 동남아로 내려가 만날 수 있던 폭포들이 수량은 많지만 흙탕물이 쏟아져 감흥을 떨어트리던 것에 비해 우리네 폭포들은 맑은 물의 매력이 수량의 부족을 메우기에 충분해 보인다.

박연폭포는 국내 폭포들 가운데 돋보일 만큼 높이에서 쏟아진다. 그만큼 소리도 박력이 있다. 물이 맑기는 여느 폭포에 비해서도 맑다. 폭포 주변은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게 손질한 흔적이 보인다. 떨어진 물은 세 갈래로 나뉜 물길을 따라 내려가다 다시 합쳐지고 새로운 물길을 받아 다시 갈라지는 모양이 귀밑머리 땋아 내린 모습을 연상시킨다.

한반도 폭포의 자랑할 만 한 점 가운데 하나로는 주변 바위들의 우람한 매력을 들 수 있다. 그런데 그 바위마다 잘날 것도 없는 인사들이 제 이름 석자 남기겠다고 기를 쓴 자국들로 입맛이 씁쓸하다. 그 가운데는 아마도 조선시대 개성유수였을 ‘유수 아무개’라고 큼지막하게 새긴 면적만으로도 몇 십 평 족히 될 키 큰 바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 그 잘난 이름을 욕보이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별 볼일 없는 인사들의 그런 민망한 행적들은 대단한 전통인양 이어지고 있으니 이를 우리네의 지극한 바위 사랑이라 불러줘야 하려나 모르겠다.

폭포 주변에는 수목이 울창한데 박달나무와 흡사한 나무가 넉넉히 열매를 달고 있어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메지나무라 한다. 폭포 앞쪽에서 오르는 난간이 있어 정자로 이어지고 그 뒤로 올라가면 관음사 오래된 절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번엔 길 보수 중이라 오를 수 없단다. 도읍으로서 개성의 사실상의 완성은 고려 4대 임금인 광종 때 이루어졌다. 관음사도 그 때 지어졌다고 한다.

덥기도 한데다 폭포 주변의 습도 때문에 짧은 길을 걸어 올라도 땀이 많이 난다. 목도 마르다. 그래서 폭포 앞에 손수레 형 이동식 점포를 차리고 차를 파는 여성에게 가 장뇌산삼차라는 걸 1달러에 사마셨다. 우리네 인삼차나 맛을 비슷하지만 장뇌삼이라니 호기심이 동하기도 해 몇 가지 차 중에 골랐다. 커피도 팔았다.

뒤로도 내내 느낀 것이지만 개성에서의 시계는 남쪽 시계의 시간보다 3배 쯤은 길다고 느껴졌다. 박연폭포에서도 우리 감각으로 필요한 시간에 비해 너무 긴 시간이 주어져 끝내는 버스 근방에 미리 내려와 한참을 서성여야 했다.

개방된 관광지가 적어서 시간 조절 때문인지, 아니면 산업화가 늦은 사회의 여유인지 모르나 한 곳에 내려놓으면 주어지는 시간이 넉넉하다 못해 넘친다. 바쁘게만 살아온 남쪽 사람들로선 그 여유에 오히려 지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선죽교와 표충사

고려 충절의 상징물인 선죽교는 교과서에서나 배울 때는 꽤 큰 축조물을 기대하지만 실제는 4m 가량 되는 짧은 돌다리에 불과하다. 그 밑에 어디 암살자가 숨어있을 수 있었는지 궁금해지는 그 구조물에는 어떤 역사적 진실이 묻혀 있는지 알도리가 없다. 그러나 선죽교와 같은 유물에 과학적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짓일 성싶다. 돌 위의 핏자국이 실제로는 산화철이 포함된 돌의 특성에 따른 자국일 뿐이라 해도 그걸 정몽주의 핏자국으로 믿고 싶었던 고려 민중들의 희망 앞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다리가 본래 그 자리에 그 모양으로 있었던 게 아니라 한들 이제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선죽교가 흐르는 개울에서 불과 10여m만 가면 그 개울의 10배 이상 되는 큰 강줄기가 흐르는 데 하필 작고 좁은 선죽교에서 그런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는지 오늘을 사는 후손들로선 알 도리가 없다. 어찌됐든 관광객들로선 교과서에서나 배운 선죽교를 보는 그 자체로 신기한 일이다.

선죽교는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그 다리의 역사를 만들어낸 조선왕조가 신하들의 변치 않는 충성심의 표상으로 그 다리를 상징화함으로써 사라지지 않은 고려 유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아이러니의 산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북한 사회 역시 충성심과 의리를 상징하는 선죽교와 정몽주에 대해 많은 가치부여를 하는 모습을 보며 역사의 반복 속에 담긴 시공간을 뛰어넘는 모든 체제의 욕망을 발견하게도 된다.

선죽교는 유학을 기본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의 선비와 사대부는 물론 왕조에서까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일종의 성지였던 듯하다. 선죽교라는 표지석 글씨는 명필로 이름났던 한석봉의 글씨로 새겨졌다. 아무리 고위직 인사라도 반드시 선죽교 앞에서는 말에서 내리라는 하마비가 서 있기도 하다. 그러나 선죽교의 일반인 통행을 막기 위해 세운 돌기둥들이 선죽교를 보호하려는 것인지 가두려는 것인지 의아해 보이는 모습으로 다리를 사방 틀어막았다.

선죽교 길 건너편에는 높이 3m 가량의 거대한 표충비 2기가 한 전각 안에 서 있다. 개성에 있던 태조의 옛 집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영조와 고종이 각각 선죽교를 돌아보고 그 충절을 기리는 글을 친필로 내려 비석에 새겼다는 비석이다. 개혁이 필요한 시기이거나 큰 사건을 치르고 나면 권력의 출발지로 되돌아가 새로운 출발의 엄정함을 다지는 의식의 일종이었던 듯도 하다.

숭양서원

고려 말 정몽주가 살던 집터에 조선 선조 6년 지역 선비들이 뜻을 모아 세웠다는 사당 문충당에는 초기에 개성이 자랑하는 정몽주와 서경덕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그 2년 후 선조로부터 숭양이라는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됐다. 그 후 김상헌, 김육 등 4명의 유학자들을 추가 배향하며 지역 선비들의 정신적 구심체 노릇을 하던 곳이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에도 살아남은 이 서원에는 조선 개국의 초석을 다졌으면서도 태종 이방원의 정적이 되어 죽음을 당했던 정도전이 글씨를 썼다는 하마비가 서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목조건물로 서원 건축의 전형적 양식을 보여주는 의미가 큰 문화유산이다.

고려박물관(고려성균관)

오늘날의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고려시대 성균관은 고려 광종 때인 992년에 국자감이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가 후에 성균관으로 개칭됐다.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전쟁이 끝난 후 바로 본래의 건물대로 복원됐다고 한다. 그러나 마당에 서있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는 992년 처음 국자감이 설 당시에 심은 나무로 우람하게 크고 넉넉한 가지와 잎으로 풍성함을 느끼게 한다. 이 나무들은 각각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서울에 있는 조선시대 성균관과 구별하기 위해 고려성균관이라고 부르는 이 건물은 지난 88년부터 고려시대 유물을 한데 모은 고려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비록 한 글자에 불과하지만 팔만대장경 금속활자가 남아있어 전시되고 있다. 원본이라면 파리국립박물관에 유일본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고려 금속활자본이 하나 더 있는 것으로서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실물이 되는 ‘직지’가 한 권 전시돼 있다.

고려청자는 물론 조선조 초기에 처음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분청사기도 몇 점 전시돼 안내원들을 붙들고 물어볼 수준이 넘는 듯한 상황에서 관광객을 당혹스럽게 하기도 했다. 빼어난 고려자기들이 좁은 전시 공간 탓인지 하나하나 설명은 고사하고 이름표 하나도 제대로 없이 무더기로 진열돼 있는 상황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마치 골동품 가게에서 중요 물품들을 좁은 선반에 다닥다닥 늘어놓은 것 같은 궁색함이 가슴 아픈 한편으로는 너무나 허술하고 무질서하게 배열된 유물 관리에 안타까움이 커진다.

고려대장경 판목, 고려시대 생활용품 등 실내 전시 중인 유물들 외에 1020년 무렵 축조된 고려 석탑 등이 다수 북측의 국가지정 문화재로 등록, 전시되고 있다. 볼거리는 많고 편치 않은 신을 신은 채 여기저기 다니느라 발을 아파 일부 유물 관람으로 마감할 수밖에 없어 몹시 아쉬웠다. 필자만의 생각이었을지 모르지만 기회가 닿는다면 박물관만 별도로 다시 가보고 싶은 욕심이 들만큼 좋은 유물들이 많았다.


잠시 쉬다 들른 기념품점엔 북측이 대표적인 관광객용 상품으로 내놓는 각종 주류와 소박한 민속공예품, 말린 나물 등이 복잡하게 진열돼 있다. 또다른 건물에는 고가의 미술품 등이 전시, 판매된다는 데 아쉽게도 발이 아픈 필자는 생략했다. 그런데 가격체계가 좀 어수선해 보인다. 참으로 많은 수공이 들어갔음직한 왕골바구니 3개 세트가 12달러, 그런가 하면 공정이 단순해 보이는 적목 부채 하나는 7달러란다. 인건비보다는 재료비가 더 큰 가격결정요소인 듯도 하고 여성노동에 의한 생산물의 가격이 낮은 건 아닌가 싶은 의구심이 일기도 하지만 더 이상 알아보지 못한 채 귀경길에 올랐다.

돌아오는 길에서는 갈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새롭게 보인다. 폐허가 된 채 방치되고 있는 풀장과 풀장으로 타고 내리는 높은 미끄럼틀이 눈에 들어온다. 갑자기 경제적 곤경으로 내몰리게 된 북쪽 사회의 상황을 새삼 실감케 한다. 그런 풍경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개성시내에선 오후 2시 쯤 갑자기 자전거를 탄 어른과 청소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시간에 학교로 들어가는 어린 학생들도 보인다. 그러다 3시 반쯤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일 다 끝난 이들 마냥 한가롭게 오간다. 하루 일정들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했다.

길거리에서 만난 초등학생인 듯한 어린이는 일행의 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런가 하면 유치원에 다님직한 어린 아이 두셋이 일렬로 늘어가 가는 차량 행렬에 놀란 양 풀숲 사이로 숨는다. 우리와 닮은 얼굴, 비록 서로 다르게 변했다고는 하나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는 같은 언어, 같은 구성의 이름을 쓰는 한민족이 사는 땅이지만 현재의 삶은 서로 많이 다르다.

점심을 먹은 통일각에선 가짓수만 늘어놓은 11첩 반상을 받았으나 재료의 빈곤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 아팠다. 재료부족을 단맛으로 감추려는 듯 단맛이 강화되며 담백한 전통 개성식의 맛은 많이 훼손돼 있었다.

식탁은 그렇다 하고 화장실에선 물이 제대로 안 나와 손님들이 바가지로 물을 퍼부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곳이 그래도 대표적인 관광식당으로 변기는 일제히 새로 교체한 듯 했으나 수도사정이 그에 따라주지 못하는 듯했다.

좋은 관광명소도 있고 문화재도 있고 관광 사업을 성공시켜 달러를 벌어보겠다는 의지는 충만하지만 아직은 다소 미흡한 점이 여기저기 보인다. 이제 시작일 뿐이니 앞으로 점차 나아질 것이다. 다만 얼마나 빨리 개선시켜 나갈 수 있을지가 관건일 뿐일 터이다. 그 때쯤 다시 한 번 개성 관광길에 나서고 싶다는 아쉬움 한 자락을 남겨두고 다시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더 많은 이들이 직접 가보고 많은 것을 느끼고 돌아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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