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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여성회 : 여성평화뉴스레터



- 갈등은 나의 빛과 그림자


박인혜(극작가/갈등해결센터 청소년교육팀원)


2008년 8월 00일

10:30 - 12:30 은영 만남
2:00 - 6:00 폭력 프로그램 진행
8:00 - ? 피해자 예비 조정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하루의 일정이 필름처럼 돌아갔다.
‘이 나이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하루 일정이 이리 보람차도 되는 건가?’ 되뇌이며 짐짓 무거운 가슴을 안은 채 집을 나섰다.
10시 반에 만나기로 한 문창과 지망생 은영이는 벌써 와 누군가에게 열심히 문자를 치고 있었다.

후배 소개로 글쓰기 지도를 하게 되었는데 처음 제의를 받고는 글쓰기 지도를 한지가 오래 되었고, 특히나 입시 준비생은 처음 해보는 거라 부담이 많았지만 한번도 글쓰기 과외를 받아 본 적이 없다는 아이의 글 치고는 꽤 솜씨가 있었고, 소설가나 희곡 작가가 되고 싶다는 아이의 희망을 듣고 비인기 직종인 희곡작가를 지망하는 그 마음이 반가워 시작을 하게 되었다.

오늘 만난 은영이는 웬지 풀이 죽어 있었다. 원체 말이 없고, 속내를 드러내는 애가 아니긴 하지만 오늘은 마지 못해 글을 쓰고 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다 얼마 전 백일장에서 상 받은 거 축하한다며 분위기를 돌렸다. 그러자 은영이는 낯빛이 더욱 안 좋아지며 고개를 떨구었다. 무슨 일 있냐고 하자 쓰던 글을 멈추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아이의 행동에 신경이 쓰였지만 모른 체 하고 쓴데 까지만이라도 검토해 보자며 아이의 글을 평가해 주었다. 공부를 마치고 일어 설 무렵 여전히 고개 숙인 채 말이 없는 은영이에게 ‘비밀’이란 책을 주었다.

“이거 저번부터 주려고 한 책인데 너한테 도움이 많이 될거야.”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 책을 살피는 아이의 눈에 물기가 배어 있었다.
“뭔 일인지는 몰라도 입시가 얼마 안 남았으니 마지막까지 힘내자.”
아마도 입시 부담 때문에 그러려니 싶어 나는 은영이의 등을 가볍게 두들겨 주며 보냈다.
고맙다며 돌아서는 은영이의 어깨가 한없이 쳐져 보여 마음에 걸렸다. 은영이의 모습이 지하철 계단으로 사라질 무렵 마침 은영이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은영이가 펑펑 울었어요. 지난 번 백일장에서 저는 우수상을 받았는데 같은 학교 아이가 최우수상을 받았대요. 걔는 그 전에도 다른데 상을 하나 받은 애라 은영이가 내심 신경쓰고 있었거든요. 거기다 걔는 글쓰기 과외도 안 받는다네요. ”
그랬구나.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전국 단위의 백일장에서, 그것도 다른 도에서 주최한 백일장에 하필이면 같은 학교 애가 받을 줄이야...
“아무래도 자긴 작가되기 글른 거 같다고... 자기가 진짜 재능이 없는 것 같냐고 저한테 물어대더니 오늘은 그래도 포기는 못하겠다면서 선생님한테 간 거예요. 별로 사이도 안 좋은 애가 저 보다 잘하니 속이 뒤집어 진 거 같아요. ”
“진작에 열 좀 내지...” 무심코 던진 내말에 은영 엄마도 그러게 말이라며 작년에 이 수업에 시큰둥하던 딸에 대한 서운함을 드러냈다.

은영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 또한 글을 잘 쓰고 싶은데 글이 안 써져 속이 시커멓게 탔던 지난 세월이 생각났다. 덜커덕 일을 받아 놓고 글이 도통 안 써져 결국 완수 못하고 방황할 때 겪은 고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하지만 그 고통의 터널을 통과한 덕에 나는 “글을 잘 쓴다는 소리 듣는 작가도 좋지만 죽을 때까지 글을 쓰는 장수만세 작가가 되겠다.”는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열정도 재능이라는 것을 이 아이는 알까?’
어려서 글 보단 노래 쪽으로 인생길이 풀릴 뻔 했던 나로선 학교 때 글짓기 상장하나 받은 게 없어도 스무살이 훌쩍 넘은 나이에 글이 주는 마력에 이끌려 원하던 작가 소릴 듣게 되었기에 초반에 열성적이지 않던 은영이가 이제라도 글 때문에 좌절하고 매달리는 모습이 좋은 징조로 보였다. 사이가 안 좋은 갈등 상대 덕에 오기가 발동하게 되었으니 지금은 괴롭지만 이것이 동력이 되어 오히려 좋은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진심을 담아 은영이에게 문자를 넣었다. “열정도 재능이란다. 힘내 -.-;; ”

은영과 헤어져 서둘러 향한 곳은 금천 청소년 지원센터이다. 한 달에 한번 씩 열리는 가해학생 대상의 폭력예방 프로그램 ‘사랑의 교실’ 진행을 위해서다. 언제나 그렇듯 오늘 이 자리에 온 아이들도 냉소와 분노의 표정으로 가득 차 있다.
“안녕하세요. 평화여성회 갈등해결센터의 000입니다.” 강단 앞에서 인사를 해도 반응이 없다. 박수도 없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가해자로 명명되는 현실에 불만이 많다는 표시인 양 딴 데를 보고 있거나 몇몇은 대 놓고 떠들거나 하는 통에 진행자로 앞에 선 나는 예상된 상황임에도 난감함을 숨길 수가 없다.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폭력관련 골든 벨’과 ‘분노의 솥뚜껑’활동에서 아이들이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언제 화가 나는가를 이야기 해보라하니 한 아이가 먼저 운을 뗀다.
“제가 치킨집 알바를 하는데요. 비 오는 날 차가 밀려 힘들게 갔다 주는 건데 늦게 갂다 준다고 지랄하는 손님 보면 진짜 닭을 확 쏟고 오고 싶어요.” 그 아이의 솔직, 적나라한 표현에 와르르 웃음들이 터진다. 더불어 학생이자 생활인으로 사는 이 아이의 고뇌가 묻어 나 가슴 한쪽이 짠해진다. 다른 아이들도 각자의 분노 지점을 드러내는데 ‘자기 말을 안 믿어 줄때’, ‘누명을 썼을 때’가 많이 나온다. 이 아이들 대부분이 학교폭력과 절도로 걸려 오는 아이들이라 억울할 수도 있겠다 싶으나 한편으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감들을 그다지 못 느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집중도가 약하고 딴청을 많이 하는 아이들과 우여곡절 끝에 교육을 마칠 무렵 나는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행복과 평화의 길은 다른데 있지 않다. 여러분이 행복과 평화의 화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란다는 다소 추상적인 나의 멘트에 비해 이 교육의 담당자인 박상희 팀장님이 전하는 당부의 말은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런 일로 또 만나지 않으면 좋겠어, 대신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고, 전화 번호 알죠? 1388. 이성 친구 문제로 연락해도 좋아요.”
시종 떠들고 까불거나 외면으로 일관하던 아이들도 이 순간만큼은 집중하고 눈들을 맞춘다. 반항심과 냉소로, 스스로 저질러 놓은 행위에 갇혀 방황하는 아이들의 분노어린 얼굴이 다소 풀려 집으로 향하는 모습에 가슴 끝이 짠해지는 시간이다.

시간은 어느새 저녁으로 향하고 이동거리가 길어 바로 대화모임 피해자 예비조정 장소로 향했다. 피해자 학생은 생각보다 밝고 자기표현을 잘해 면담을 하는데 편히 할 수 있었다. 부모님도 가해학생들에 대한 분노가 크지만 대화모임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고 계셨고 적극적 의지를 보이셔서 몸은 피곤했으나 협력조정자님의 센스 있는 보조까지 더해져 마음은 무척 편안한 예비조정이 될 수 있었다. 대화모임 날짜를 잡고 피해자측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헤어졌다. 협력조정자님과 예비조정이 잘 된 것에 대해 서로 자축하며 평가를 하고 있는데 남편의 전화가 걸려온다.
술이 잔뜩 취한 목소리로 언제 오냐 묻기에 좀 걸린다 하자 알았다고 잘났다며 끊는다. 이어서 남편의 친구가 전화해 함께 있는데 남편이 너무 취했으니 와서 데려 갔으면 좋겠다고 한다. 한 시간이 지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니 남편이 술에 잔뜩 취해 손으로 밥을 먹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 남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게 남편 친구가 한마디 한다.

“이 친구가 어렵게 박사 끝내고 일이 잘 안풀리니 실망이 너무 큰거 같아요.”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박사 된다고 당장 취직자리가 보장되는 거 아님을 누구보다 본인이 잘 알고 있었으면서 막상 학위가 끝나고 그마저 있던 강의 자리 마져 잃자 마음을 못 잡고 세상 원망을 해대는 남편을 본 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견디기가 어려워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간신히 남편을 끌고 와 현관문을 열기가 무섭게 신발도 못 벗은 채 마루에 쓰러지는 남편을 보니 열이 더 뻗쳐 올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 당신 왜 내 인생에 끼어들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해? 나도 힘들고, 위로 받고 싶다고... ”
혼자 미친 사람마냥 소리를 질러대는 사이 손바닥만한 거실에 쓰러진 남편은 어느새 코를 골고 있었다.
그때 문득 올라오는 생각이 있었다. ‘겉으로는 세상을 다 아는 것 마냥 사람들앞에 작품을 써 보이면서, 밖으로는 평화교육을 하네, 갈등해결 강사를 하네 하면서 정작 내안의 나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마다 화로써 문제를 풀고 있으니 나의 갈등해결 방식은 분노로 밖에 안 되는 건가?’

자책과 무력감이 뒤범벅되어 잠든 남편을 방으로 잡아 끌려다 평화워크샾에서 만났던 허스트 선교사의 아들 이야기가 생각났다. 거실을 어지럽히는 아들 때문에 스트레스 받다가 본인만 불편한 거지, 당사자인 아들은 불편해하지 않음을 알고는 야단치던 일을 중단하고 본인의 불편해소를 위해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는 이야기를 떠 올리며 ‘세상 모르고 자는 저 사람은 마루에서 자도 괜찮지. 불편은 그걸 바라보는 나에게 있었음’ 을 새삼 깨달았다.
골아 떨어진 남편에게 베개를 배어 주며 갈등은 삶의 연속임을 절감한다. 그와 동시에 삶은 갈등의 연속임을 깨닫는다. 더불어 갈등이 없었으면 이 세상에 나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수억마리 정자들의 치열한 갈등이 없었으면 나도 이 세상에 올 수 없었을 것이다. 갈등은 나의 빛과 그림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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