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어린 친구들에겐 퍽이나 생소한 풍경이겠지만 1960년대 중·후반까지도 농촌에선 밥을 얻어먹으러 다니는 거지들이 참 많았다. 그만큼 살기가 어려웠다는 말이 되겠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으로 어려운 사람을 쉬이 외면하지 못하는 참으로 살가운 세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시절에 지금의 초등학교부터 중·고등학교를 다닌 나는 방학 때면 늘 할머니 댁에 내려가 온 방학을 마음껏 게으름 부리다 돌아오곤 했다. 그 때도 방학 중에 학원엘 다니거나 과외공부를 하느라 제대로 놀지 못하는 친구들이 제법 많았지만 자유로운 어린 시절의 추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님 덕분에 나는 남다르게 여유로운 방학을 누린 셈이다.
한가한 농촌의 한여름 뙤약볕조차 무료해질 무렵이면 할아버지는 젊은 일꾼을 시켜 뒷동산 큰 나무를 골라 굵은 동아줄로 그네를 매달아주곤 하셨다. 동산에 매단 그 그네를 타면 산속의 바람을 타는 듯 특별히 시원함을 느끼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거의 베짱이 수준의 게으른 방학을 즐기는 할머니 댁에서의 나날은 참 즐거웠지만 딱 하나 고역스러운 일이 집에 온 거지에게 밥상을 내다주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겐 우선 낯설고 지저분한 그들이 무서웠다. 중학생 쯤 돼서는 학교에서 배운 어줍지 않은 사회의식을 앞세워 거지들을 동정하는 것이 그들의 자립정신을 해칠 뿐이라며 반대해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냥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기 두려운 어린 마음이 더 컸던 듯하다.
그런데 할머니는 그런 거지들에게도 소박하지만 제대로 차린 밥상을 내놓곤 하셨다. 비록 내용물이야 찬 보리밥 한 그릇에 김치, 나물 두엇하고 간혹 냉국이 나가거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그냥 냉수 한 사발 나가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당시의 생활이 토지 제법 가진 농가의 평소 밥상 또한 크게 다르지 않던 시절이었다.
거지에게 뭐 그리 깍듯이 상을 차려 내느냐고 툴툴대는 어린 손녀에게 할머니는 입을 막으며 “듣겠다. 그런 말 하지 마라. 오죽하면 남의 밥 얻어먹으러 다니겠느냐. 마음 상하지 않게 얌전히 갖다 줘라”라고 말씀하셨다. 혹시라도 그 거지가 상처 입을까봐 할머니는 마음 쓰신 것이다.
1902년생이셨던 할머니는 현대적인 교육을 받지도 않으셨다. 16살에 시집와 번다한 시집 식구들 속에서 허리 한번 펴보기 어렵게 사셨지만 그 분은 타고난 본성으로 타인의 상처를 살필 능력이 있으셨던 듯하다.
그런데 어리석은 손녀는 그런 할머니의 깊은 뜻을 이해하는 데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눈뜨기 시작한 것이다. 받는 이의 상처가 얼마나 클 수 있는지를. 남을 돕는 일이 자칫 잘못하면 도움을 받는 상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은 과시적인 내 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를 행복하도록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게 아니라 비참함을 느끼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면 아니함만 못하다. 모든 종교 경전들이 다 자기만족을 위한 선행을 선행이라고 칭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종교가 범람하는 현대사회에서 그런 가르침의 고갱이들은 어디론가 사라진 듯하다.
북한이 자존심을 내세운다고 “굶어죽는 놈들이 무슨 자존심?”이라고 비아냥거리는 우리 사회의 천박함에서 철들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내 무안한 초상을 보며 발전해 나가지 못하는 우리의 정신 수준에 안타까움이 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