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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여성회 : 여성평화뉴스레터


그리운 금강산에 다녀오다


- 안김정애(진실화해위원회 근무 한국여성평화연구원 이사)


“금강산 참석 가능. 참가비 입금바람”

로또복권에 당첨된 듯한 뿌듯함.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누나.
금강산에서 열리는 ‘6?15공동선언 발표 8돌 기념 민족통일대회’에 평화여성회 대표라니.
워낙 거물급들만 가는 줄 알았는데
불초소생에게도 이런 기회가 오누나.

6월 15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대회.
이른 아침 길을 나섰다.
아침 6시 반에 출발에 혹시 늦을세라 노심초사하느라 잠을 설쳤다.
나를 비롯, 여연과 여협, 원불교여성위, 천주교여자수도회, 세계평화연합 등 여성계 대표는 총 12명.
일본, 미국, 캐나다 등 해외인사를 포함한 전체 대표단은 300여명.
즐비한 버스 사이로 촛불집회로 긴밤을 지새운 한총련, 대학총학 등 깃발 든 학생들이 “안녕히 다녀오십시오” 우렁차게 인사를 한다.
코 끝이 찡하다.
이명박의 ‘미친 소’ 쇼 덕분에 힘들텐데, 저 젊은이들 머릿속에는 아직 우리의 통일의지가 살아 있구나.


설레는 맘으로 눈을 감는다.
금강산은 어떤 모습일꼬?
난생처음 마주 대하는 금강산이 짓궂은 날씨나 돌연한 사고 등으로 혹시 나를 거부하지는 않을까?
8순의 우리 오마니가 늘 노래부르는 그 금강산일까?

설친 잠을 보충하기 위해 다시 눈을 감는다.
홍천 부근에서 갑자기 울리는 손전화 벨소리.
“정경란인데요. 오늘 열리는 대회가 파행을 겪을지도 모르겠네요....”
이건 웬 날벼락인가?
대회참석하겠다고 거짓으로 병가까지 내 가며 참석하는 건데.
이야기인즉슨 북측 위원장의 연설원고에 촛불시위문제가 언급되어 있다는 것으로, 선발팀이 현재 줄다리기 중이지만 만약 원고 수정 요구가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공식적인 대회참석을 보이코트해야 할 것 같은데, 의견이 어떤지를 묻는다.
이명박 정권이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촉발된 평범한 시민들의 건강권 지키기 움직임에 대해 ‘친북좌파세력 배후설’을 주장하는 판에 북한의 발언은 자칫 촛불시위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정간섭으로 비쳐져 가뜩이나 이명박 정권에서 움츠러들고 있는 남북관계가 더 냉각될 수 있다.
개인적인 입장에서는 솔직히 북측위원장의 연설이 어떤 내용이든 ‘우리끼리 평화통일’만 들어간다면 그까짓 ‘촛불’ 언급쯤이야... 아니지. 이 몸은 엄연히 평화여성회 대표 아닌가? 여연, 그리고 다른 여성계 대표들과 협의가 필요하다는 말로 전화를 끊는다.

“아, 금강산은 나를 거부하는구나.”

어쨌든 이왕 내친 걸음, 금강산까지는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가자, 가자.
얼마나 기다려 왔던 걸음이냐?
가서 대회참석이 무산되더라도 금강산의 품에 한 번 안겨봐야겠노라.

고성에서의 통관수속.
우리나라 우리 땅을 가는데 외국 땅을 밟는 것 같다.
여권처럼 생긴 방북증, 여기에 도장 찍어 주기.
법무부 출입국 관리소 직원들, X-ray 짐검사...
다시 차에 올라타고 군사분계선을 향해 출발.
남한 땅 지나고, 드디어 북한 땅.
갑자기 나타나는 북측 초소, 짙은 갈색 제복의 북한 군인들.
땅도 그 땅이고 하늘도 그 하늘이련만 이렇게 갑자기 모든 게 변하다니.
아니 정말 변한 걸까? 맞다. 변했다. 북측 통행 검사소에서 보게 된 출입국 관리원들.

“평화여성회가 구리시에 있습네까?”
순간 당황했다. 마치 외국 땅에서 처음 접한 외국어인 양, 무슨 질문인지 처음엔 잘 못 알아 들었다.
“뭐라구요? 아, 예... 평화여성회는 서울에 있구요, 구리시는 제가 사는 집 주소인데요.”
어떻게 알겠는가. 나도 북한 사람 누군가가 “모 기관은 평양에 있구요, 나는 평양 인근 모처에 삽니다”하면 못 알아 들을 게 빤한 것을.
그 관리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하다.

외금강 호텔에 도착, 원래 방을 같이 쓰기로 하였던 수녀님이 동무를 따라 다른 방으로 가 버리는 바람에 거실 딸린 호화판 객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외국 호텔과 다를 바 없이 부티나게 꾸며진 객실을 확인하고 점심 식사하면서 여성계 몇 몇이 모여 대회참석여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회장인 문화회관으로 평양번호판을 단 승용차와 버스 몇 대가 서더니 똑같은 옷차림을 한 북측 대표들이 우르르 몰려 나온다. 처음 보는 얼굴들, 그저 머쓱하니 서 있자니 그것도 참 멋쩍다. 그저 목례를 할 뿐. 이럴 땐 달려가 진심어린 포옹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나 뿐만이 아니고 대부분 서로 서먹서먹하다. 원래 이런 분위기인가? 이렇게 어색해서야 원....

대회가 시작될 찰나, 위원장 연설문은 합의가 끝났으나 결의문에 최근 남한의 촛불정국을 은유하는 표현이 다시 문제가 되어 대회장인 문화회관에 입장하시는 백낙청 위원장님을 밖으로 모셔내와 다시 남측대표들이 대책회의를 열었다. 가까스로 타협안이 마련되어 예정보다 30-40분 늦게 입장이 시작되었고, 한반도기 입장과 대회사, 북측위원장의 연설도 원고대로 진행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해외측 대표이신 일본의 곽동의 의장께서 원고에도 없는 즉흥발언-“우리는 남한 인민의 최근 촛불집회를 지지합니다”-을 하시는 바람에 대회는 파행을 겪게 되었다.
나름대로 일본에서 해외동포로서 장시간, 그것도 아직도 반국가단체로 찍혀 있는 한민통의 수장을 오랫동안 맡아 오신 노장의 말씀을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한다. 작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사건과 관련하여 참고인 자격으로 우리 조사관들과 만난 적도 있어 구면이기도 했고. 하지만...
곽의장의 발언으로 여성계와 참여연대, 평화네트워크, 민변 등 대표들이 ‘합의사항 불이행시 대회참가 계속 불가’를 선언하며 대회장을 나와 버렸고, 조금 후에 종교계가 따라 나왔다가 종단 대표의 발언은 경청해야 한다는 취지로 다시 들어가 대회가 진행된 모양이다.

대회 마무리 시간에 들어가니 “누구 맘대로 대회계속 여부를 결정했느냐”며 일부 대표들의 일방적인 대회진행에 대한 항의가 거칠다. 다시 각 대표단이 의견을 모으기로 하고 일단은 예정되어 있던 공식일정-사진전 개막식-은 참가하기로 하였다.
사진전은 2000년 6월 15일의 감격을 담은 사진을 필두로 작년 노무현 대통령의 10월 4일 방문사진이 앞을 장식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미모의 북한 아가씨가 낭랑한 목소리로 설명을 한다.
“아, 예쁘다. 역시 남남북녀인가...”
인물감상도 잠깐, 다시 여성계 대표단이 모여 의견수렴을 했다. 일부에서는 곽의장의 발언이 크게 문제될 게 없고, 계속 참여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개진되었으나 대부분은 “합의는 지켜져야 한다. 최소한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큰 걸음을 내딛기 어렵다. 따라서 잘못된 것에 대한 정식 사과를 받지 못한다면 남은 일정에 계속 참석하는 것은 어렵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잠시 후 곽의장의 대표단 회의에서의 공식사과 의사를 접수하고 다시 공식일정인 만찬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한 여성대표는 “이렇게 큰 문제없이 거의 제 시간에 만찬을 하는 건 처음”이라고 해서 다들 웃었다.
한 끼 밥을 제 시간에 함께 먹는 것도 쉽지 않은 게 통일로 가는 길이구나.
우리 식탁을 책임진 아가씨는 분홍색 한복이 잘 어울리는 앳된 얼굴의 미인이었다.
“정말 미인이네요. 혹시 나이를 물어 봐도 돼요? 열일곱? 열여덟?”
“스물 셋이야요. 호호호...”
쾌활한 성격으로 이것저것 음식에 대한 설명에도 부지런하다.
처음보는 음식도 여러 가지.
그리고 우린 아무래도 과다한 조미료에 미각을 잃었는지 북한 음식은 어째 조금 뭔가 모자란 듯하고 싱겁다.
북한 음식을 북한 땅에서 먹어 본 건 좋다만 월남하신 우리 부모님의 북한 음식타령에 선뜻 동의하기가 어려우니...
어쨌든 배 부르게 먹고 난 후 우린 각자 숙소로 흩어졌다.
긴장이 풀리면서 간밤에 설친 잠이 쏟아진다.


6월 16일 이른 아침.
강한 햇살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새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금강산이 나를 반기는구나.”

이 날 일정은 대표단 전원-400명 쯤-이 삼일포를 둘러 보는 것.
삼삼오오 짝을 지어 길을 걷는다.
북한 여성을 몇 분 만나 얘기를 나누었지만 어색함은 그냥 남는다. 여성계 왕초인듯한 한 분은 내가 평화여성회에서 왔다고 하니까 반가와하면서 “내레 이김현숙, 김숙임 선생은 잘 알아요. 안부 전해주시라요” 미안하지만 이름은 기억 못 한다. 변명을 하자면, 딱히 명함을 서로 내미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기념사진을 몇 장 찍었다. 잠시 쉬는 길목에서는 막걸리에 감자전, 꼬치구이를 안주삼아 한 잔씩 하고 “통일을 위하여” 건배도 하고.
그런데 이상한 건 반미의 나라에서 달러가 통용된다는 거. 유로화도 물론 받지만 우리네 땅에서 서로의 화폐는 꺼내 보이지도 못 하면서 남의 나라 화폐인 달러가 통용되는 게 너무 신기했다.

그리고 폐막식.
아침에 시작된 공동위원장단 회의가 길어지는지 첫날처럼 폐막식 역시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11시 30분에 시작하기로 예정되었던 폐막식이 오후 1시가 넘어서야 시작되었다.
개막식과 달리 폐막식에서는 특별한 일 없이 잘 지나갔다. 대부분의 연설이 “현 시국이 어렵지만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을 잘 지켜 나가자. 615정신인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기치를 높이 들고 나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불편했다.
왜 주석단에는 여성이 한 명도 안 보이는가?
폐막식에서 북측의 김명옥 여맹 부위원장이 원고를 읽어 내려가기는 했지만 통일문제가 남성만의 권위주의적이고 가부장제적인 구도에서 흘러가는 건 아닌가 여성끼리의 남북통일은 요원하다는 걸 보여주는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불현듯 생긴다.
마지막으로 하룻동안 게양되었던 한반도기가 아리랑 가락 속에 서서히 내려와 접히면서 왈칵 울음이 솟았다.
언제 다시 저 사람들과 다시 만나 저 깃발을 볼 수 있을까?
남북한 모든 땅에, 아니 저 멀리 해외동포들이 사는 전세계 방방곡곡에 “우리는 하나”임을 알리는 저 한반도기가 꽂힐 날은 언제일까?
한반도기가 사라진 무대를 바라보며 우린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박수를 쳤다
식이 끝나자 북측 대표들이 평양행 차에 다시 오른다.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전날처럼 그저 먼발치에서만 속으로 인사한다.
“안녕히 가시라요. 다음에 또 만나자구요. 언제까지 어렵사리 만나 쉽게 헤어져야 하는지. 부디 다시 만날 그 날까지 건강들 하시라요...”

귀가길.
북한 땅을 벗어나자 온 몸의 기운이 쭉 빠진다. 긴장이 완전히 풀리는 느낌. 남한 군인들을 보자 반갑기도 한데, 방금 전에 보았던 북한 군인들의 모습과 묘하게 겹쳐지면서 기분은 야릇했다.

1박2일의 일정이 마치 1년인 듯, 오랜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듯한 느낌.
우린 얼마나 힘들게 우리가 평화통일의 여정을 이어오고 있는가?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자신의 소속과 소감을 얘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하룻동안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를 갖고 몇 시간씩 실랑이를 하고 고성이 오가고, 식사 한 끼 제 시간에 함께 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린 아직도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잠깐동안의 남북 만남도 이렇게 어려운데, 지금까지 끝없는 인내와 눈물을 보이며 정말 힘들게 평화통일의 길을 이끌어 오신 모든 분들께 감사해야지.
해질녘 저녁 바람이 상쾌하다.
우리 딸들에게는 산뜻한 소감을 전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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